파면 해임당한 나는 왜 '멋진' 교수인가?
나는 특수교육을 전공했다. 내가 특수교육과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수교육이 뭔지 몰랐다. 나도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에 처음으로 그런 과가 있는 줄 알았다.
나는 기계공고 특수기계과에 다녔다. 특수기계가 거창한 것은 아니다. 밀링 혹은 연삭기를 학교에서 편의상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나는 자격증을 못 땄다. 손재주가 없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이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진학을 결심해야 했다. 가난한 학생들이 그렇듯 나도 일찍 돈을 버는 과를 우선으로 생각했다.
처음에는 서울교육대학교에 입학하고자 했다. 성적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남자만 따로 뽑았기 때문이다. 남자들 입학 성적은 여자들에 비하여 높지 않았다. 좀 열심히 하면 도전해 볼만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내 뒤에 앉은 짝이 어느 날 특수교육과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뭔지도 잘 몰랐지만, '특수'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특수교사가 되는 과정에서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삼았다. 이 원칙은 지켜지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나는 가급적 지키고자 했다. 그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손해가 적지 않았다.
'고정관념은 살인이다'
아래는 내가 특수교사 생활을 하면서 겪은 내용이다.
교실로 올라오니 교탁 위에 시커먼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맥주 두 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학생에게 맥주를 선물 받은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맥주에 사연이 있다는 것을 한 달쯤 후에 알았습니다. 맥주를 사 온 그 아이가 저세상으로 가고 나서였습니다.
오월 어느 월요일 아침에 그 아이는 학교에 오자마자 아프다고 했습니다. 아프면 집에 가라고 농담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아이는 가방을 쌌습니다. 평소에도 그 아이와 장난을 잘했기에 그때도 장난으로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잠시 후에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다른 반 어머니가 그 아이가 버스 정류장에 쪼그리고 앉아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구나’ 걱정하며 뛰어갔습니다.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의 집에 전화했는데 받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중환자실에 아이가 입원해 있다고 했습니다.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면회하러 가니 아이는 이미 하체가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의사는 아이의 목으로 피를 빼내고 있었습니다. 심장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낮은 소리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아이는 월요일 아침에 학교에서 집으로 오자마자 아프다고 떼를 썼습니다. 어머니는 평소에 그 아이가 다니던 병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기 위해서 거리로 나왔습니다. 별로 먼 거리가 아니라 걸어가자고 했더니 아이는 막무가내로 택시를 타야 한다고 우겼습니다. 택시 잡기가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평소에 가지 않던 집 앞 병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습니다.
아이의 어머니가 좀 멀어도 다니던 병원만 고집했던 이유는 병원을 옮겨야 하면 장애가 있는 자신의 아이에 대해서 하기 싫은 구차한 소리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단골로 정한 병원이라면 구태여 아이의 장애가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아이가 너무 유난을 떨어서 바로 집 앞의 다른 병원에 간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찰받자마자 의사는 아이를 빨리 큰 병원으로 데려가라며 어머니를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주일 전에도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늘 다니던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감기약을 주어서 그것을 먹였습니다. 어머니는 의사의 말대로 아이가 그저 감기를 자주 앓는 약골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늘 다니던 병원의 의사는 아이가 또 왔다고 생각하고 건성으로 그냥 전번의 약을 지어준 것입니다. 전번에는 전전번의 처방대로 전전번은 또 전전전번의 처방대로.
늘 다니던 병원의 의사가 청진기만 제대로 아이의 가슴에 대어보았더라면, 늘 그런 정도로 아픈 애라는 고정관념을 갖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는 중환자실에서 이틀을 더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성남 화장터에서 아이를 화장시키고 그 아이의 뼈를 뿌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미처 떨어져 나가지 못한 그 아이의 흔적들이 검정 양복을 털자 후드득 떨어졌습니다.
며칠 뒤 아이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는 월요일 아침에 아이가 저에게 사주었던 맥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학교 오기 전인 일요일 오후에 아이는 자신의 용돈으로 맥주 두 병을 샀습니다. 지난번 학교 수업에서 아이를 패스트푸드점에 데리고 간 것이 너무나 즐거웠기 때문에 그것을 보답하려고 샀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맥주를 사서는 냉장고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 가는 시간에 맞춰서 백화점 봉투에 맥주를 담았습니다. 어머니가 백화점 종이봉투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도 아이는 선물은 백화점 봉투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원하게 냉장이 잘 된 맥주를 종이봉투에 담았으니 종이봉투가 견딜 리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날은 비까지 왔습니다.
우산을 쓰고 그것을 들고 학교에 오는데 결국 백화점 봉투가 비에 젖어 터지면서 맥주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졸라 다시 맥주 두 병을 샀습니다. 이번에는 가게에서 주는 시커먼 비닐봉지에 담아서 학교까지 무사히 가지고 와서 교탁에 놓았습니다. 그 아이는 맥주 네 병을 샀고, 저는 두 병을 선물로 받은 셈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그 아이도 이제 술 한 잔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직도 미성년자인 양 잔만 받고 마실 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