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면, 해임당한 나는 왜 '멋진' 교수인가?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들은 명절이 더 힘들다. 가장이라면 더 그렇다. 파면이나 해임당하여 당장 수입이 없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 쪼그라든다. 그것이 무엇이든, 없는 사람에게 명절은 초라해지거나 비굴해져야 하는 날이다.
2007년에 부당해고를 당했을 때 그랬다. 집안에 알리지 않았다. 그해 7월 17일로 부당해고를 당했으니 추석 몇 달 전이었다. 하필 추석 전에 엄마가 허리 수술을 하셨다. 엄마가 아프니 내 신세가 더 처량해졌다. 엄마가 누워있는 병원 침대에서 복직이 되지 않으면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속으로 생각했다.
과일 파는 생각을 했다. 어디서 과일을 떼야 하나? 리어카는 어디다 보관해야 하나? 아니다. 1톤 트럭을 사는 게 좋겠다. 장사는 나에게 맞지 않을 것 같다. 택시 운전을 할까? 덕수 택시를 떠 올렸다. 장애인도 기사로 채용해 준다는 것을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내가 지원하면 호의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시는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요즘은 안 바쁜가 보구나”
내가 엄마 병원에 자주 나타나자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나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단순히 부당해고를 알리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뭔가 큰 죄를 지은 것 같았다. ‘괜히 나서서 이 지경이 되었구나’라는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어느 날부터 대인공포와 함께 가슴에서 불이 타는 것 같았다. 어지러웠다.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친구의 사무실에 가서 찬 대리석 바닥에 한 참 누웠다. 잘 진정되지 않았다. 저녁이 되었다. 그런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들은 알았을 것이다.
엄마는 추석을 앞두고 퇴원하셨다. 하지만 나의 부당해고에 대한 재판은 막 시작에 불과했다. 내가 이길 줄 알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서 결과가 만들어지는 일이란, 사람을 힘들게 한다.
마음이 한 번에 무너졌다. 사람의 마음이란 끝까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다. 서서히 조금씩 무너지다, 어느 순간 갑자기 ‘확’ 무너지는 것이다. 2007년. 힘들었다. 하지만 이겨냈고 복직했다. 2년이 걸렸다. 모두가 보기 싫었다. 한동안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2021년에 파면되었을 때는 집안에 알렸다. 아니 부모님이 먼저 아셨다. 내 표정과 행동에 이상을 느낀 아버지는 인터넷으로 나에 대하여 검색하셨다. 검색하는 것을 알려드리지 않았다면 모르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낡고 오래된 컴퓨터에서 내가 파면되었다는 기사를 읽으셨다. 언제부터 아버지가 나에 대하여 검색하셨는지는 모른다. 파면 기사에 아버지가 얼마나 놀라셨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면 기사 전에는 아버지가 나를 자랑스러워하셨을 것은 뻔하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강원도 화전민 출신의 고아였던 아버지 아들이 대학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아무 잘못 없다는 것을 안다. 그동안 고생했다”
아버지의 말투는 침착하지 않았다. 흥분이 묻어 있었다. 어렸을 적, 고모부는 인천항에서 하역하다 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고모부의 옷을 태우면서 꺼이꺼이 우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도 우신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버지가 내게 건넨 목소리는 그때의 그 울음소리와 같았다.
2021년 또다시 추석이 되었다. 나는 2007년에 부당해고를 당했을 때처럼 힘들까 봐 잠시 두려웠다. 그러나 세상은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언제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 친구들이 십시일반 모았다며 200만 원을 보내주었다. 힘내라고 하였다. 적은 돈이 아니었다. 설날이 되었다. 이번에는 더 많은 친구가 돈을 모았다. 액수는 추석과 비슷했다.
잠시 나는 고민했다. 돌려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신세를 질 때는 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도움을 받자.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