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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다 Sep 22. 2022

휴일 아침은 코튼과




  손가락 서넛 들어갈 정도로 살짝 열린 창 틈으로 희미한 차 소리가 들려온다. 마을이 깨어나는 소리, 아파트의 층간을 통해 전해지는 크고 작은 생활 소음, 멀리서 웅얼거리는 듯한 사람들의 목소리. 아마 그 소리는 내가 소리를 인지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깨어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함께 했으리라.


  '너무 오래 잤나? 어젯밤 보던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늦게 잠자리에 들었더니...'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열고 일어나 볼까 하는데 온몸이 무겁다. '천근만근'은 아닌데 '물먹은 솜처럼'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자세를 바꿔 돌려눕는 것조차 귀찮고 힘들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쥐가 난 건 아닌데, 특히 무릎부터 종아리까지 누가 철사를 우겨서 넣어놓은 것 같다. 힘든 일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지 모르겠다.

  '이제 곧 바빠질 텐데 10분만, 아니 30분만...'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대며 일어나는 시간을 자꾸 늦추고만 있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배가 고프다고 나를 깨우는 짹짹이들은 아무도 없다. 다행이다. 잠시만 더 누워있어야지 하던 게 다시 눈을 뜨니 1시간 반이 훌쩍 지나버렸다. 낮게 내려진 블라인드를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살과 새소리, 아마도 올여름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미 기세가 한풀 꺾인 매미의 울음소리에 섞여 간혹 들리는 귀뚜라미의 이중창이 귓전을 울린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 허리가 다 아파온다.


  달콤한 잠에서 그냥 일어나기는 아쉬워 침대 위를 더듬어 나의 '코튼'을 찾아본다. 자다가 일어나면 보통 발치까지 밀려나 있거나 침대 아래 방바닥에 떨어져 있기도 하는 코튼. 이 아이는 원래 막내가 다이소에서 고른, 부드러운 융 천으로 된 줄무늬 고양이 인형이다. 몇 번의 목욕 후 몸 안의 솜이 뭉쳐 울퉁불퉁하고 눈은 오른쪽을 향해 쏠려있어 예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정이 들었다. 막내가 아빠를 졸라 '조르디'라는 인형을 득템한 후 코튼은 무수리에게 사랑하는 님을 뺏긴 중전마마가 되었다.


  애들이 어렸을 땐 여자 셋이 큰 방을 함께 썼고, 그 후 막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막내와 침대를 함께 썼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한동안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며 잠은 함께 자기도 했는데,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남편과 한 방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막내를 대신하여 코튼을 안고 자게 되었다. 가끔 코튼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말 없는 코튼은 내가 찾을 때마다 부드럽게 나를 안아주고 때로는 걱정스러운 눈길을 던진다.


  이제 나이가 오십이 넘은 아줌마가 무슨 애착 인형이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인형은 꼭 아이들만 갖고 놀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제2의 사춘기를 맞은 나에게 부드럽고 적당히 작아서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인형은 작은 위안이 된다. 그렇다고 여행갈 때나 친척 집을 방문할 때도 데리고 가지는 않는다. 짐이 많아지는 것도 싫고 꼭 데리고 가야 잠이 올 정도는 아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인형에 대한 결핍이 있었다. 빠듯한 살림에 엄마는 소꿉놀이는 사주셨지만 인형의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셨던 것 같다. 한동안 두꺼운 마분지에 만화 주인공과 옷, 액세서리를 그려서 파는 종이 인형을 가지고 놀거나, 만화를 잘 그리는 친구 언니가 종이에 예쁜 공주를 그려주면 옷도 바꿔 입히면서 이야기를 지어내서 놀았다. 그러다가 마론인형이 나왔다. 한 살 어린 내 친구에게는 엄마가 사주신 구체 관절 인형이 있었고, 자석으로 거울에 붙는 신발도 있었다. 내가 문방구에서 파는 마론인형을 가지게 된 것은 국민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남들이 인형놀이에서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싸구려 인형을 사게 된 것이다. 아직도 그 인형이 입고 있던 분홍색 뜨개 원피스와 따로 문방구에서 샀던 반짝거리는 하늘색의 투피스, 연분홍 구두가 생각이 난다. 하지만 친구의 인형과는 달리 무릎도 별로 굽혀지지 않았고 피부색도 달랐다. 한동안 자투리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하고 오래가지고 놀았던 내 마론인형.


  그런 결핍 때문이었을까, 나는 우리 애들에게도 인형을 많이 사주었고, 애들이 이미 관심이 없어졌는데도 디즈니 백설 공주와 라푼젤을 사줬던 기억이 난다. 예쁜 인형을 사주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던 표면적 이유와 함께 내가 인형을 가지고 싶었던 속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결핍은 성장의 촉진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퇴행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갱년기의 나이에 애착 인형에게서 위안을 얻는 것은 단순한 퇴행이 아니라 허전한 마음의 반영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보드라운 코튼을 안으며 나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본다.




p.s. 한번씩 자기를 허그해 달라며 나를 귀찮게 하는 남편을 위해서도 포근한 애착인형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거 먹고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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