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기회
추위에 움츠려들었던 어깨가 조금씩 긴장을 풀고 뺨에 와닿는 바람이 엄마 손처럼 부드러워질 때 발길은 밖으로 향한다. 봄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던 1월이었는데 때가 되면 얼음이 녹고 꽃이 핀다.
하얀 매화가 봄소식을 알리며 피기 시작하더니 노란 산수유가 왕관 같은 꽃망울을 터뜨린다. 이에 질세라 낮은 곳에선 보라색 제비꽃과 샛노란 민들레가 시멘트 바닥의 좁은 틈새에서 머리를 내민다. 우아한 백목련이 자태를 뽐내고 봄꽃의 여왕 벚꽃이 핀다. 봄이 오는 줄도 모르고 바삐 지내던 사람들의 얼굴이 벚꽃처럼 환해지고 도시는 잿빛을 벗고 몽환적인 연분홍 꿈을 꾼다. 일주일쯤 지나 벚꽃잎이 흩날리며 아쉬운 작별을 고하면 이로써 봄은 끝난 것인가 허무감에 잠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봄은 우리에게 복사꽃과 겹벚꽃을 선물하며 화려하게 컴백한다. 진분홍과 빨강 철쭉, 영산홍, 아젤리아가 화사하게 피고 먼 산언저리까지 물들인다. 겨우내 거의 유일하게 우리를 위로했던 동백꽃은 마지막 숨결을 뿜고 툭 떨어지거나 힘없이 매달려있다.
이름마저 예쁜 삼색 버드나무가 시선을 끌고 홍가시나무가 거리를 붉게 물들인다. 황금 사철, 홍가시나무처럼 눈에 띄는 색깔의 조경이 늘고 있다. 이런 색감이 드물었던 시절에는 예쁘다 감탄하면서 봤는데, 너무 흔하게 볼 수 있으니 은은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그리워진다. 시끄러운 곳에 있으면 조용한 곳을 찾듯이 화려함에 질리면 새로 돋는 나뭇잎이 훨씬 싱그럽게 다가오는 것이다. 연두, 연두, 초록, 초록한 나뭇잎을 보고 있으면 중년의 마음에 새록새록 새순이 돋는 것 같다. 굽어진 허리를 펴고 우두둑 소리가 나는 무릎을 재촉해 산책을 간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 이렇게 많은 꽃과 나무가 때를 맞춰 소생하는지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라고, 너의 씨앗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터뜨리면 된다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것 같다. 새로 돋는 나뭇잎처럼 자연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준다. 다시 시작하라고, 움트라고, 너의 꽃을 피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