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이 있는 삶

by 류다



'서투르다', '(정리가 안되서) 구질구질하다', '치명적이다'. 일상에서 건져올린 형용사가 좀 더 밝고 경쾌한 빛깔을 띄고 있다면 나의 행복함을 반증하는 것이겠지. 문득 떠오른 낱말들은 어찌하여 하나같이 기운빠지게 하는 것들인지, 이런 낱말들로 나를 정의내리기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내게 '의미있는' 형용사는 과연 무엇일까. 극으로 치우치지 않고 내가 지향하는 바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잠시 생각의 뜰을 거닐다가 떠올린 낱말은 '여유로운'. 나는 항상 마음의 평화와 여유를 갈구했다.


좀 더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사전을 펼쳐보았다.


* 여유롭다 餘裕롭다 (형용사) 여유가 있다.
-유의어: 너그럽다, 느긋하다, 한가롭다.
* 여유 (명사)1. 물질적, 공간적, 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
(명사)2.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 -유의어: 경황, 시간, 여백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여유롭다'는 '여유가 있다'는 뜻인데, 그럼 '여유'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물질적, 공간적, 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내가 꿈꾸는 것은 이런 중첩적인 의미의 여유는 아니다.


맞벌이부부지만 남편이 돈을 잘 주지 않기에 물질적으로 넉넉하다고 말할 수 없다. 공간적인 여유를 살펴보면 4인 가족이 28평 아파트에 많은 책과 짐의 틈바구니에 치여 살고 있으니 숨이 막힐 때가 많다. 이사도 미니멀 라이프도 생각해 보지만 쉽지 않다. 그리하여 물질적, 공간적 의미에서 여유롭게 산다는 건 거의 포기한 상태이다. 나이가 오십이 넘으면 어느 정도 욕심은 비우고 포기할 것은 포기한 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법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신포도의 원리라고 해도 말이다.



출근하기 전에 일찍 일어나 모닝 페이지를 쓰고 공부나 운동을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N잡을 하거나 재테크를 하는 사람도 있다. 퇴근하고 나서도 학원이나 학교, 평생교육원 등에서 관심 분야의 강좌를 듣는 사람도 많다. 나도 한 때 이런 걸 시도하거나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나에겐 너무 힘이 들어서 금방 포기하게 되었다. 취미생활, 영어공부, 운동 등 목표한 바를 체크리스트식으로 점검하며 노력한 적도 있었지만, 꾸준한 실행이 따라주지 않으니 자괴감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고 싶지 않았다. 잠시 여유도 없이 전력질주하는 것이 내 성미에 맞지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게을러도 괜찮아' 이런 책들이 나오는 걸 보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게으른 자의 변명으로 여겨질지라도 가늘고 길게,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살고 싶어졌다. 끝없이 해야 할 일들에 쫓기며 10분 마다 스케줄을 처리하며 바쁘게 살고 싶지 않다. 직장 상사의 말이 떨어지면 급하게 바로 처리해야 되고, 남보다 뒤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사는 건 싫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는 시간도 필요하고, 휴일에 늦잠을 자고 누워서 뒹굴뒹굴 책을 읽을 짬도 필요하다. 새 소리도 듣고 풀내음도 맡을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이 좋다. 가끔 오래된 영화도 보고 급할 것 없이 친구와 오래 통화도 하고, 혼자 근교로 드라이브도 갈 수 있는 여유. 이런 여유로운 시간, 쉼에서 내일을 준비할 기운이 충전된다. 시간적인 여유는 느긋하고 너그럽게 행동하는 마음의 여유로 이어진다. 내가 찾는 진정한 여유는 그러한 것이다.





이런 나도 여유를 즐기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의외로 여행지에서일 경우가 많다. 특히 해외여행일 경우, 마음만큼 자주 나가기 어렵기 때문에 타이트한 일정을 선호한다. 양말에 구멍이 날 때까지 돌아다니는 것이 나의 여행 스타일이다. 누구나 가치관에 따라 어떤 부분에서는 지극히 여유롭고 일부분에서는 한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함이 있을 것이다.



반면, 지나친 느긋함과 여유는 내적인 성장을 방해하며 나태함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바쁜 시간 뒤의 여유로움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항상 한가로운 것은 지루함과 권태로움이 아니겠는가. 바쁨과 여유를 적절하게 조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삶의 기술이다. 나자신이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적절한 균형.



나는 오늘도 도화지 가득 빽빽하게 그려진 그림을 지우고 여백의 미가 있는 동양화 같은 삶, 그런 여유로움을 꿈꾸어본다.



#마음의여유 #여유로움 #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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