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각본, 나 연출, 나 주연의 인생이니까
우리는 유독 나이라는 숫자에 민감하다. 이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50대가 꼭 알아야 할 모든 것, 올해가 아홉수라서 마음이 불안하다는 등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며 산다. 나 또한 그러했다. 20대 취업부터 60대 퇴직 준비까지, 그 나이에 맞는 과업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물론 나이대에 맞게 살아가면 인생이 수월하긴 하다. 그렇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탄탄대로가 기다리진 않는다. 인생의 모퉁이마다 불쑥 복병처럼 나타나는 새로운 위험과 고비, 인생이 우리를 어디로 몰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반대로 실패만 거듭하던 사람이 좌절하지 않고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도전해서 성공한 일도 있다. 할랜드 샌더스가 1008번의 실패 후 KFC 1호점을 낸 것은 68세 때였다. 이런 일화들은 우리를 고무시키거나 반대로 좌절시키기도 한다. 우리가 사이보그도 아닌데 100번의 이력서도 아니고 1000번의 도전을 과연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에게 의미가 있는 작은 시도가 의외로 새로운 시작의 물꼬를 틀게 할 수도 있다. 굳이 거창한 도전이 아니라도 괜찮다.
몇 년 전부터 많은 사람을 매혹시킨 모지스 할머니는 7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101세까지 맹렬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파리의 세관원이었던 앙리 루소도 40세에 그림을 시작하여 47세에 첫 작품을 발표했다.
우리나라에도 40세에 등단한 국민작가 박완서와 46세에 등단한 소설가 김훈이 있다.
92세에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해서 98세에 첫 시집을 발간해서 밀리언셀러 작가가 된 시바타 도요,
51세에 '빅 슬립'으로 등단한 레이먼드 챈들러(이 추리소설 작가를 표현할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제일 존경하는 작가라는 말이 항상 따라온다.)도 늦깎이 작가이다.
60살이 넘은 신춘문예 수상자도 있고 70세 넘어 시나리오 작가가 된 사람도 있다고 한다.
모두 이 사람들처럼 되라는 말이 아니라(될 수도 없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고작 나이를 핑계로 도전도 하기 전에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살짝 덧붙여 보자면, 나는 34살에 대학에 편입학했고, 36세에 교사가 되었고 39살에 둘째를 낳았다. 42살에 처음 해외여행을 했으며, 52살인 올해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욕심쟁이는 아니지만 앞으로 또 무엇인가를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림에도 관심이 가는데 감상보다는 직접 그리는 것에 도전해 보고 싶다. 물론 이렇게 생각한 지는 코로나 초기였으니 좀 부끄럽기는 하다.
일반 노선으로 가면서 평화를 얻는 법과 독자 노선으로 가면서 평화를 얻는 법이 있다고 한다. 출발점에서 곧은길로 가는 사람과 굽은 길로 돌고 돌아가는 길이 있다. 어느 길을 택하던지 자신의 성향이며 선택이다. 쭉쭉 뻗은 길을 가는 사람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한다. 아주 효율적이고 심플해서 좋다. 그런데 나처럼 고집 세고 비뚤어진 사람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 구불구불한 길을 걸으며 헤매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방황하다 겨우 자신을 발견하고 그 길을 간다. 돌고 돌아 나에게로 가는 길. 그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가족들이나 타인들에게 답답하게 보일 수도 있다. 길을 찾아 헤매던 이십 대의 나를 지금 만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조금 늦어도 괜찮아. 어차피 인생이란 정답이 없는걸. 이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다른 길로 돌아가면 돼."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아이들은 엄마처럼 힘들게 고민하지 않고 일반 노선을 선택해서 가기를 바라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내가 자랐던 환경보다는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났으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엄마의 시선에서 보이는 '더 좋은 선택'이 과연 아이에게도 그럴지는 장담할 수 없다. 돌아서 멀리 가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가능성을 외면하지 않고 최선의 것을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맛없는 것을 먼저 먹지 말고 맛있는 것을,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며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자신의 인생을 쓰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나 각본 나 연출 나 주연. 물론 외부 환경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우리를 옥죄어서 변화의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땐 조금만 버티기, 그리고 내 안에 변화의 기운이 차오르도록 기다렸다가 작은 하나의 도전이라도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떨까. 아무리 어두운 터널이라도 끝은 있다. 어떤 시기에, 어떤 길을 어떻게 갈 것인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나의 인생은 내가 결정하고, 모든 것을 되돌리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
# Bgm. 늦지 않았음을/ 푸른하늘(송재호)
#에필로그 #나이는숫자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