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게으르고 공부보다 노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가끔 숙제도 안 해가서 손바닥을 맞기도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학생수가 많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서 등교했는데, 오후반이 될 때는 놀면서 숙제를 계속 미루다가 학교 갈 때가 다 되어서야 허겁지겁 숙제를 하다가 결국 끝내지 못했다. 그때는 두 명이서 긴 책상을 함께 사용했고, 학교에 가면 숙제를 걷어서 칠판 아래에 분단별로 쌓아두었다. 엄하신 여자 선생님은 숙제 검사를 하다가 다 못한 공책을 발견하면 나오라고 해서 나무 회초리로 손바닥을 몇 대씩 때리셨다. 그렇게 우리는 맞고 자란 세대.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말도 안 되는 단체기합을 또 얼마나 받았던가.
그랬던 내가 책과 공부에 처음으로 눈을 뜬 것은 초등학교 5, 6학년 무렵이었다. 아마 5학년 선생님의 긍정적인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공부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처음 맛보는 책과 지식의 세계는 정말 흥미진진했고 나는 책 속에 풍덩 빠져들었다.
요즘이야 학교의 도서실이나 어린이 도서관을 통해 희망도서를 신청할 수도 있고 책이 없어서 못 읽는 학생은 별로 없지만, 내 어릴 적에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책이 귀했다. 학급문고가 있긴 했지만 오래된 책이 대부분이었고, 새 학년이 되면 집에 있는 책이나 새 책을 한 권씩 가져와 학급문고에 내서 다 함께 볼 수 있도록 했다. 어떤 선생님은 권장도서 목록에 따라 학생별로 책을 구입해 오라고 지정해 주었고, 선생님 말씀은 무조건 들어야 되는 줄 알던 시대였다. 당시 나에게 할당된 책이 '마해송 동화집'이었는데, 문방구나 서점에 가도 그 책을 구할 수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다른 책으로 가져간 기억이 있다. 새소년 등의 아동잡지, 계몽사 문고, 탐정소설, 창작동화 등 그렇게 읽은 많지 않은 책들은 나를 꿈의 세계로 이끌었다. 특히 부모님이 사주셨던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소년소녀 세계명작동화는 잊을 수 없다. 처음에는 계몽사에서 나온 책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중에 그 책들이 너무 그리워져서 언니들에게 물어보니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었다고 한다. 비슷한 구성으로 금성출판사에서도 나왔으니 정확하지는 않다.
황톳빛 하드 커버에 각 권마다 두꺼운 종이 케이스까지 있었는데, 우리 집에 전집이 모두 있었던 게 아니라 반질만 구입해서 이웃집이랑 바꿔보았다. 기억에 남는 책으로는 개미가 된 '촌도리노의 모험'이 있는 남유럽 동화집, 빨강머리 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컬러로 된 수준 높은 삽화와 드문 드문 생각나는 이야기의 여러 장면들이다. 다시 읽고 싶고 갖고 싶은 책들이다.
만화책의 세계를 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단짝 친구를 통해서였는데, 만화방에 돈 많이 갖다 바쳤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것은 순정만화로 일본 해적판 만화를 비롯해서 황미나, 신일숙, 김혜린, 강경옥 국내 순정만화 트로이카 시절을 거쳐 어른이 되어서는 커다란 PC로 순정만화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매콤한 떡볶이를 먹으면서 읽는 만화책은 나에게 누추한 현실을 잊게 하는 마법의 세계였다.
중학교 때는 언니들이 읽던 책, 고모가 두고 간 어른 책을 읽기도 했으나 동화책이나 만화책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다만, 언니의 심부름으로 동네 서점에 가서 산 손바닥만 한 삼중당 문고의 '제인 에어'는 나를 매혹시켜서 어른이 되어서도 제인 에어를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아직도 세부적인 묘사가 떠오를 정도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쩌면 나는 제인 에어의 삶과 비슷한 운명을 살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책을 수십 번 읽게 되면 그 주인공과 동화되어 닮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스스로 책을 읽고 주도적으로 공부하는 재미에 빠져서 휴일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갔다가 저녁 늦게 집으로 올 때 느꼈던 충만한 인생의 즐거움. 그런 순수한 즐거움에 빠졌던 그때가 그리워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도서관을 찾았지만, 이미 세상사 걱정으로 얼룩진 나에게 그때의 충일함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지혜를 갖고 싶어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처럼 나는 불안하고 조숙한 사춘기를 맞았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는 점점 나와 멀어지고 있었다.
# Bgm. Book of days/ En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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