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매실나무

by 류다




고향집 마당엔 매실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까만색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양쪽으로 좁디좁은 정원을 가로지르는 좁다란 길이 있었고, 그 길은 부엌 뒷베란다로 연결되었다. 통로 왼쪽에는 회양목과 향나무 등 꽃이 피지 않는 관목이 심어져 있었고, 오른쪽 땅에는 매실나무와 키가 큰 목련나무가 있었다. 그 매실나무는 아버지 친구분이 퇴직 후 매실농장을 여실 때 한 그루 얻어온 것이었다. 드라마 허준의 영향으로 매실이 각광을 받기 전부터 아버지 친구분은 매실의 효능을 말씀하시던 매실 예찬론자였다.

아버지는 작은 나무를 받아와 심은 것 같은데 그 나무가 쑥쑥 자라 어느 날 매화꽃도 피우고 매실 열매도 주렁주렁 달리기까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관상용이 아니고 매실 열매를 얻기 위한 수종이라 그랬던지 아니면 영양분이 부족했던지, 매화꽃도 예쁘고 풍성하지 않았다. 봄이 오기 전에 제일 먼저 피는 꽃이기에 매화꽃이 몇 송이 피면 그저 '봄이 왔구나.'하면서 지나치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5-6월에 매실이 달리면 매실을 따서 매실청을 담거나 매실주를 담그셨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지만, 집에서 담근 술은 즐기시지 않아 주로 매실청을 담으셨다. 설탕과 매실을 1 대 1 비율로 담는 게 정석인데, 가끔 설탕이 몸에 좋지 않다고 설탕의 양을 줄여서 담은 탓인지 맛이 없는 해도 있었다. 우린 다 매실 음료를 좋아하지도 않았기에 음식을 만들 때 잡내를 없애는 용도로 쓰일 때가 더 많았다.


아버지는 약주를 즐기셨는데 주종은 주로 소주였고, 가끔 맥주를 드시거나 제사 때 쓰는 경주 법주, 설중매를 좋아하셨다. 한 마디로 주종을 가리지 않으셨다. 결혼 후 고향집을 방문할 때면 으레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설중매를 자주 사들고 갔었다. 아마 아버지가 은근히 사위에게 술은 보약이라며 약주 타령을 했기 때문이리라. 초록색 작은 병에 금색 뚜껑, 병안에는 세 개의 초록 매실이 들어있는 설중매. 딱 한 번인가 그 맛이 궁금해 아버지와 대작한 적이 있었다. 내게는 몹시 달았고 주도도 14도로 꽤 도수 높은 술이다.

그렇게 사위와 설중매로 대작을 하던 때였을까. 언젠가 아버지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 애가 막내라 철이 좀 없네. 우리 딸 잘 부탁하네."


젊었을 때는 엄청 괄괄했던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종이호랑이처럼 위엄이 사라졌고, 어머니는 반대로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머니가 의료기 상사나 계모임, 동사무소 문화센터에 가고 없을 때, 친구를 만나지 않고 집에 있는 날이면 아버지는 딸들에게 전화를 하셨다.

"뭐하노? 잘 있제?"

별로 용건은 없고 그렇게 몇 마디 하다 끊는다 소리도 없이 툭 끊는 게 아버지 전화 스타일이었다. 우린 처음엔 황당했지만, 우리가 전화를 잘 안 해서 아버지가 심심해서 전화하시는가 보다 생각하고 말았다. 딸들이 전화를 하는 것은 늘 어머니한테 였지 생일이나 어버이날 등을 제외하곤 아버지를 찾는 일은 잘 없기 마련이다. 자식들에게 특별히 다정하게 대해준 적도 없었기에 우리는 그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책에서 '그냥 전화했다'라는 말은 '보고 싶다, 사랑한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임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 그것을 안 이후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한창 크던 시절 아버지의 잔소리와 꾸지람을 모두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자연스레 그렇게밖에 흐르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연금을 다 까먹고 배는 볼록한데 팔다리만 야윈 모습을 보면 불쌍한 생각은 들었지만, 멀리 떨어져서 살다 보니 가끔 찾아뵙거나 용돈을 쥐어드리는 것으로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항상 매우 솔직하셔서 용돈에 관련해서도 서슴없이 기분을 표현하셨다. 결혼하고 무슨 행사로 집에 들렀을 때 아버지께 용돈 20만 원을 든 봉투를 드렸더니 너무 적다고 봉투를 던지면서 가져가라고 화를 내신 적도 있었다. 이건 비단 나에게만 한 행동은 아니다. 지금은 다 늙은 노인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기분이 나빠서 어머니께 투덜대기도 했다.

예부터 매화는 가난하고 이름 없는 선비의 지조나 절개를 상징하기도 했다. 가난하고 이름 없는 퇴직한 선생님을 찾는 제자는 거의 없고 주변의 친구들도 하나 둘 부고를 보낼 때, 아버지 옆에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은 마당의 매화나무와 설중매, 그리고 가족이었다. 1남 3녀의 자식을 두었으나, 세 명의 딸은 다 멀리서 살고 그나마 같은 도시에 사는 아들은 아버지를 자주 찾지 않으니 아버지는 겨울의 매화나무처럼 외롭고 쓸쓸하셨을 것이다.


아버지가 어느 날 주무시다가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은 추석이 지나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딱 이 무렵이었다. 얼마 전 아버지의 기일이 지났고, 아버지를 모신 선산을 찾은 것도 몇 해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밤나무가 많은 그 선산엔 지금 수풀만 우거져 있겠지.


관심을 가지는 이가 없어서일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우리 집의 매실나무는 점점 더 볼품 없어졌다. 매실나무의 키가 커지면서 사다리를 놓고 따야 될 정도의 높이에 매실이 달리니까 혼자 사시는 어머니로서는 귀찮게 느껴지기도 하셨다. 매실청을 많이 먹는 것도 아니기에 매해 매실청을 담그지는 않게 되었다. 간혹 매실이 열리는 철에 아들이 와서 마지못해 따주면 그 해는 매실청을 담그고, 아니면 못 담그고 지나가는 해도 있었다. 그 매실나무를 아버지가 심었다고, 매실이 들어간 설중매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추억하는 일도 점점 드문 일이 되었다.


살아생전에 그렇게 아버지와 자주 싸우시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아버지에 대한 나쁜 기억은 다 잊히고 좋았던 기억만 생각이 나신다고 하셨다.

"내가 자네 때문에 이렇게 잘 살았지. 고맙고 사랑하네."

죽음에 대한 예감이 있으셨던 것일까. 이 말을 한 바로 다음날, 아버지는 앓는 데도 없이 주무시다 심정지로 돌아가셨으니, 어머니에게는 그 말 한마디가 매화 향기처럼 남아있었을 것이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 어머니의 뜻대로 절에서 49재를 마치고 돌아온 고향집 마당에는 마른 나뭇가지에 매화꽃 몇 송이가 소담하게 피어있었다.



# Bgm. 아버지/ 인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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