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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다 Mar 04. 2023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시작(始作)'이라는 말에는 힘이 있다. 전날까지의 어둠과 그늘, 두려움을 밀어젖히고 희망이라는 것을 부여잡게 되는 힘. 죽음을 생각할 정도는 아니지만 '자다가 이불킥'하게 되는 많은 실수들과 잠 못 자게 계속 떠오르면서 괴롭히는 현실의 답답하고 괴로운 상황들. 어떨 땐 이런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새하얀 백지로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처럼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면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랑스러운 여인의 이야기, 드류 베리모어가 나오는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헨리는 여자와 진지한 관계를 맺기를 두려워하는 바람둥이 남자이다. 어느 날 식당에서 루시라는 여자를 알게 되고 그녀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데, 다음날 만난 그녀는 처음 만난 사람처럼 그를 경계한다. 교통사고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고 일어나면 사고 후의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사고가 났던 날인 아빠의 생일날로 돌아간다. 헨리는 루시의 사랑을 얻기 위해 매일 색다른 이벤트를 벌이지만, 다음날이 되면 그녀의 머릿속은 다시 백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교통사고가 났던 사실을 알려주고 그 이후 사귀었던 시간을 말해주면서 조금씩 가까워진다. 매일 만나 데이트를 하지만 그녀에게는 매일이 첫 키스이다.

  루시의 가족과 헨리에게는 답답한 노릇이지만, 어쩌면 루시에게는 매일 새로운 눈으로 하루를 볼 수 있으니 꿈같은 일이 아닐까. 도돌이표라도 좋다, 매일 만나는 현실을 신선한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매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처음처럼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인생이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첫 키스만 50번째'보다 훨씬 전에 나왔던 영화 중에 빌 머레이와 앤디 맥도웰이 주연한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첫 키스만 50번째'의 남자 버전이라고나 할까. 

  자기중심적인 TV 기상 캐스터 필은 PD 리타와 함께 행사 취재차 한 마을에 왔다가 폭설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고 마을로 다시 돌아온다. 다음날부터 필은 매일 똑같은 마을에서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상황을 겪게 되고, 어차피 달라질 것은 없을 테니 마음대로 여자를 만나고 돈 가방을 훔치기도 하는 등 나쁜 쪽으로 상황을 전개한다. 그래도 다음날 일어나면 역시 똑같은 하루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빌은 절망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지만 다음날이면 다시 깨어난다. 매력적인 리타에게 사랑을 느끼면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으로 주변 사람들을 돕게 된다. 사랑의 블랙홀에 빠진 그에게 그토록 원하던 새로운 시작, '내일'의 시간이 다가온다는, 로맨틱하면서 희망적인 이야기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그렇게 하지 않는 건데...' 또는 '그 때 열심히 공부했었더라면 지금은...'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매일 비슷한 후회의 늪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삶이 힘들 때는 그렇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정말 어렵게 생각되기도 한다. '시간의 덫'에 빠진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희망과 사랑이 아닐까. 

 



  어제와 똑같은 시간과 공간, 늘 만나는 사람들과 비슷한 대화를 하며 살아가는 쳇바퀴 같은 일상이다. 그런 일상을 매일 특별하게 살아내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루, 한 달, 일 년이라는 단위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의 단위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대 수메르 사람들은 달을 기준으로 태음력을 만들었고, 이집트인들은 태양을 기준으로 한 태양력을 사용했다. 나일강이 언제 범람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했고, 시리우스 자리가 동쪽에 나타나면 나일강이 범람했고, 그 주기는 365일이었다고 한다. 생명과 직결된 농업 때문에 과학이 발전하고 달력이 만들어졌다. 

  이 달력 속에서 우리는 희망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을 꿈꾸기도 한다. 비록 어제는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아팠지만,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비비안 리처럼 도전적으로 쏘아보면서 외쳐보자. 'Tomorrow is another day!'라고.

  #시작   #기억상실증   #에세이  #달력   #내일이있는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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