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다 May 27. 2023

늦둥이의 시대, 적령기란 없다

못다 한 이야기








초연한 척해도 숫자에 아주 무심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사람의 인지상정이겠지. 하루에 평균 1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읽어주는 나의 브런치. 가끔 사람들이 어떤 글을 어느 정도 읽는지 통계를 살펴보곤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350명이라는 사람이 내 글을 읽었다고 뜬다. 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브런치 작가님도 많으시겠지만, 새 글을 올리지 않으면 서너 명쯤 들어오는 류다의 브런치에 몇백 명이 들어왔다는 것은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지나서 봤기에 브런치 어디에 뜬 건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회수만 늘었을 뿐, 공감과 구독자수에는 별 반향이 없었기에 그저 그렇게 스치고 지나간 해프닝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도 혼자만의 글을 쓰다가 누군가 읽어준다는 것을 알게 되니 글을 꾸준하게 쓸 기운이 충전된다.



작년에 브런치 작가 승인을 받으면서 몇 편의 에세이를 쓰고 브런치북으로 묶으면서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듯이 오랜만에 자신이 팽창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사상 최대 50명을 뽑는 브런치북 공모전에 떨어지면서 그러한 충만함은 풍선처럼 빵 터져 버렸다. '첫 술에 배부르랴, 나는 내 갈 길을 가련다'하며 묵묵히 글을 쓰면 될 텐데, 브런치 작가 소개에서 '작가지망생'을 은근슬쩍 지워버렸다. 글쓰기의 고민을 담은 매거진 '글이 취미가 되지 않게'를 아무도 모르게 '취미로써의 글쓰기'라고 교묘히 바꿔버렸다. 위장이라는 건 참 간편하다. 난 원래 작가가 될 재목이 아니라고 둘러대는 것은 쉬운 변명이 될지는 몰라도 참으로 궁색하고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첫 브런치북을 내고 난 후, 내용과 분량보다 후회가 되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원래 혼자 생각한 제목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였는데 너무 올드해 보인다는 문우들의 의견을 존중해 '늦지 않았음을 기억해'로 바꿨다. 진짜 종이책도 아니고 판매되는 전자책도 아닌데 내 마음에 드는, 내가 하고 싶었던 제목으로 했다면 좀 더 자기만족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브런치 매거진은 제목을 바꿀 수 있어도 이미 브런치북으로 완성이 된 후에는 제목을 바꿀 수 없다는 것.


브런치북 그 이후의 이야기, 이를테면 이혼의 위기라든가 몸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과 살아가는 불편함 등에 대해 솔직하게 글을 써도 좋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쓰기가 싫어진 것이다. 글쓰기는 집중을 필요로 하는데, 일상에서 만들어지는 숱한 핑계들은 나를 글쓰기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가벼운 글쓰기에 치중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에세이클럽 글벗과의 '일주일에 무슨 글이든 한 편 쓰기'의 약속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지금도 내 블로그에는 60여 편의 제목만 저장된 글감이 있는데, 느낌이 왔을 때 글을 써야 되는데 그냥 스쳐 보내기 일쑤다. 역시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동년배 중에서는 내가 매우 늦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허겁지겁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도 숨이 턱에 닿아있었다. 좀 늦는다고 뭐 큰일 나는 것도 아니요, 늦은 결혼과 늦둥이, 늦은 공부도 흔히 볼 수 있는 시대라 안심이 된다. 이제 젊은 세대에게 결혼이 필수도 아니요, 결혼 적령기라는 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 마음이 맞으면 나이에 관계없이 결혼을 선택한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공부하는 사람이 흔하고, 직업을 위해서 뿐 아니라 성장을 위한 공부와 독서를 하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30대에 시작하든 50대, 70대에 시작하든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무엇을 하기에 딱 알맞은 시기라는 건 정해져 있지 않다. 물론 가능하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작하면 좋겠지만 그때는 절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부모로서 학령기에 있는 자녀에게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안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녀가 책상에 앉게 만들 수는 있어도 공부하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 요즘의 부모다. 문을 닫고 자기만의 방에서 공부를 하던지 다른 걸 하던지, 그건 자녀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을 슬프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학령기'에 있지만 몸만 배움터에 있으며 꿈이 없는 아이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지 못하고 부모에게 되묻는 아이를 보며 아이들 눈에는 고리타분할 수 있는 이야기를 조언이랍시고 해준다.

무수한 가능성을 앞에 두고 자신을 제한시켜 버리고 오늘의 편함을 추구하며 잠만 자는 아이를 보면 걱정이 한숨으로 나오지만, 아무리 잔소리를 한다고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 나 또한 늦게 배움의 길을 걸어갔기에 몹시 고되고 힘들었다. 지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라도 자신의 길을 다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에 용기를 얻기를!



#적령기  #나이  #선택

매거진의 이전글 아름다운 시절, 동심으로의 회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