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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다 May 14. 2023

아름다운 시절, 동심으로의 회귀




가끔 어렸을 적에 읽었던 동화책이 몹시 생각날 때가 있다. 동화책의 어떤 장면이나 멋진 삽화, 그리고 그 속에 나오는 음식들이 그려지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린다. 추억 속의 '소년소녀 세계명작동화'를 떠올리는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얼마 전에 도서관에 가서 동화책 세 권을 빌렸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비밀의 화원', '사랑의 가족'. '해저 2만 리'나 '로빈슨 크루소' 등 다른 책도 나를 유혹했지만, 막상 들고 오면 다 읽지 못할 것 같아 참았다. 



특히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 그 속에 나오는 그림이 몹시 사실적이어서 하이디가 처음 할아버지를 찾아올 때 입었던 검은 옷이라던가, 소녀의 분홍빛 뺨이라던가 이런 것들이 언뜻언뜻 기억 속에서 재생되는 것이었다.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아니 실제로 먹으라고 해도 지금은 못 먹을 것 같은 염소젖을 그 당시에 비닐 포장에 담긴 매일우유나 가끔 목욕탕 가면 먹을 수 있었던 병우유의 고소한 맛을 떠올리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치즈를 바른 흰 빵과 상상 속의 염소젖을 상상하며 마음속 허기를 달랬다. 물론 소공녀 세라의 다락방 만찬도 내가 즐겨 상상하던 장면이다. 먹을 것이 풍요롭지 않았던 시절, 책 속의 음식이나 멋진 것들은 내 마음을 위로하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다. 마치 소공녀나 하이디처럼 나 자신이 사랑을 듬뿍 받을만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유쾌했다.


동그란 창으로 알프스의 풍경이 내다보이는 하이디의 풀 침대를 떠올리면 폭신한 감촉이 느껴지며 어디선가 풋풋한 풀냄새가 풍겨오는 것만 같았다. 아직도 어릴 적 읽었던 그 풍경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는 중년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는 사이에 태양은 어느덧 저물기 시작했다. 하이디는 풀 위에 앉아 저녁노을에 물든 꽃을 황홀한 듯이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튕기듯 벌떡 일어나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페터, 저것 좀 봐! 불이 났나 봐. 저기 바위가 불타오르는 것 같아. 풀밭도 하늘도 모두 새빨개. 불이 난 게 틀림없어."

"저건 언제나 그래. 아무 일도 아니야."

페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하지만 불이 난 것이 아니라면 저렇게 새빨갛게 될 리가 없잖아."

"저절로 저렇게 되는 거야. 내일도 또 볼 수 있어. 자, 이제 돌아가자."

"정말 내일도 볼 수 있어?"

"그럼, 물론이야."

그 말을 듣고 하이디는 몹시 기뻤다. 이렇게 아름다운 저녁노을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던 것이다.


오두막집에 돌아온 하이디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오늘 너무 멋졌어요. 온갖 꽃들도 보고 불타는 바위도 구경했어요. 그리고 이것 좀 보세요!"

하이디는 할아버지 앞에서 앞치마를 풀어서 흔들었다. 그런데 열심히 모아 두었던 꽃들은 이미 다 시들어 말라 있었다. (중략)


하이디는 계속해서 산 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특히 아름다웠던 저녁노을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해님이 산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거란다. 가장 예쁜 색으로 산을 물들이면서 아침이 올 때까지 자기를 잊지 말라고 하는 거지."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하이디의 시선을 잃는다는 것이겠지. 페터처럼 무덤덤하게 주변을 보게 되는 것, 시들어 말라버린 꽃들처럼 시간 속에서 어린아이의 눈을 잃게 되는 것일 터이다. 동심으로 읽은 하이디의 세계는 갓 짠 따뜻한 염소젖과 말랑말랑한 치즈가 듬뿍 올려진 빵처럼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하이디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이유일 것이다.



'피터팬 신드롬'이라는 용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1983년 미국의 심리학자 댄 카일러(Dan Kiley)가 쓴 『피터팬 신드롬(The Peter Pan Syndrome)』이라는 책에서 지적된 이 용어는, 신체적으로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에 따른 책임과 역할을 거부하고 어린이의 심리 상태에 머무르고자 하는 심리적 퇴행 상태에 빠진 어른들을, 영원히 늙지 않는 동화 속 주인공에 비유한 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 피터팬 신드롬 [Peter Pan syndrome] (선샤인 논술사전, 2007. 12. 17., 강준만) 인용).


성인이 되었는데도 어린 시절의 분위기와 감성을 가지고 어린이다운 장난감을 수집하거나 재미와 판타지를 추구하는 키덜트(Kidult)라는 용어도 비슷한 맥락에서 떠오른다.


먹고살기에 바빠서, 아이를 낳고 키우고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기 바빠서 잊고 있었던 유년 시절의 꿈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것이 심리적인 퇴행이며 과거지향적인 퇴보라 할지라도, 그것이 고착화되는 것이 아니라면 뭐 어떠한가. 누구에게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자신에게 주는 소중한 선물과 휴식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아무 걱정 없이 순수하고 해맑았던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산책을 하면서 어둠 속에서도 환한 금계국을 만났다. 인생에 즐거움이 없고 속절없이 한숨만 나올 때, 사람들은, 아니 나는, 흘러간 시간 속에서 유리알같이 티 없이 맑은 아름다움을 찾는다. 


#잃어버린동심   #피터팬신드롬   #알프스소녀하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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