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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다 Sep 18. 2022

도망치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왜 나는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내 안의 창작욕구 때문?


며칠 전 글쓰기 수업에서도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었는데, 다른 사람이 발표할 때 머리를 굴려 '무의미에의 저항'이라느니 '기록에 대한 강박적 욕구,  '내게 있는 작은 재능의 발산'이라느니 그럴듯한 소리를 주워섬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냥 쓰고 싶으니까, 사람에게 있는 자기표현에 대한 욕구 때문인 것 같다. 평소에 자기 얘기를 잘 안 하는 편이니, 얼마나 억눌린 표현 욕구가 마음속에서 들끓고 있었겠는가.


멍석을 깔아주면 재주를 못 부리는 것처럼 막상 진짜로 내 글을 쓸려니 뭔가 턱하니 가슴이 막히면서 시작을 못하겠다. 괜시리 자주 안 들어가던 블로그 이웃님이 생각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다른 이의 이야기에 마음을 뺏겼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한 것. 이런 게 회피 기제인가.


매년 하는 비슷한 행사에도 계획서를 쓰기 전에 자료 수집에 더 골몰하는 내 성격을 이번에도 속일 수 없었다. 글쓰기를 하려면 맨땅에 헤딩하긴 어려우니 책을 한 권 읽어야겠다 싶어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최옥정님의 '2라운드 인생을 위한 글쓰기 수업'을 읽어보았다. '어느 날 오십 세가 나를 찾아왔다'는 말이 어찌나 마음에 다가오던지.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앞에 조금 읽다가 말았다.  (지금은 다 읽었다)


선생님이 보내주신 짧은 에세이는 어찌나 재미있던지. 특히 눈앞에 굴튀김 접시를 두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하루키의 '굴튀김 이야기'나 통통 튀는 젊은 느낌의 김혼비의 시리얼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었다. 이런 재미있는 글을 읽다 보니 내가 쓸려고 하는 글은 더 멀리 도망가 버린다. 세상에는 이렇게 읽을만한 글이 차고 넘치는데 어쭙잖은 내 글을 보탠다는 것에 의기소침해지는 순간. 읽는 즐거움과 쓰는 괴로움의 대비여.



자연스레 내 안에서 이야기가 차올라 흘러나오기를 좀 더 기다려야겠다며 또 한 권의 책을 꺼냈다. 지난해인가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부드러운 양상추'가 떠올랐기 때문에. 푸드 에세이답게 음식에 대한 잔잔한 이야기가 마치 일본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읽을 때는 아주 좋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책이지만, 글을 쓰는 입장이 되어 책을 다시 훑어보니 구구절절 마음에 다가오면서 이렇게 쓰기도 참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들은 우리 범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내는 일상의 일들을 캐치하여 자신만의 감성으로 엮어내어 우리가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만든다.


'이쯤에서 포기해'하고 내 안의 악마가 나지막이 귀엣말을 건넨다. 어쩌면 이번의 글쓰기 수업으로 나는 좀 더 겸허한 독자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음식이라고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어릴 때부터 음식에 대해 관심이 많았건만, 막상 음식에 대한 주제로 글을 쓰려고 하니 단편적인 기억만 떠오를 뿐.


이왕 에쿠니 가오리를 꺼내 들었으니 '부드러운 양상추' 필사나 해볼까? 지금 내 기분과 비슷한 부분이 나와서 옮겨본다.





  하면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데, 에잇, 하고 마음먹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 갖가지로 많다.  태만하기 때문이라고 하면 그뿐일지 모르지만, 귀찮아서가 아니라 그냥 무섭다. 과장이 아니다. (중략)

  내 경험상 '에잇'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1. 에잇은 심술꾸러기다.

  2. 일단 스위치가 들어오면 멈출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멈출 수 없게 되면, 반드시 걸어야 하는 전화를 모두 걸고난 후에도 그렇지, 거는 김에 그 사람에게도 걸지 뭐, 하면서 걸지 않아도 좋을 전화까지 걸고, 냉장고 안을 깔끔하게 치운 후에도 어차피 정리하는 거, 하면서 신발 정리에 신발장 선반까지 전부 닦고 싶어 한다. (중략)


  에세이를 쓸 때도 '에잇'은 필요하다. 하지만 집필에 관한 그것은 전화나 청소, 교정지를 볼 때와는 성질이 다르다. 한번 불이 붙었다 하면 멈추지 못하는 일이 없는 점은 교정지 때와 비슷하지만, 안타깝게도 쓰기 위한 '에잇'은 토막난 시간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다른 일을 하는 '척'할라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간 채 당분간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오전 시간이 다 지나고, 오후가 되고 말았다. 매주 매주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마는지 생각하고, 어제저녁 무슨 바람이 불어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 찜 요리를 했는지 지금 와서 반성해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에세이는 무섭고, 무서운 일과 마주하려면 결심이 필요하고, 나는 결심을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에잇.


에쿠니 가오리 [부드러운 양상추] 중 '에잇'








그나저나 '에잇'하며 글쓰기 시작할 때는 데드라인 바로 전날일까. 아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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