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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다 Sep 03. 2023

군자란을 보내며

엄마의 정원




엄마 집에서 가지고 온 군자란을 얼마 전에 정리했다. 몇 년째 꽃이 피지 않고 잎만 무성했는데, 그마저 병이 들었는지 영양 부족인지 한잎 두잎 갈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뭘 한다고 그렇게 바쁜지 물을 말리기 일쑤였다. 주인의 관심을 받지 못한 군자란은 더 이상 꽃을 피우며 살아있음을 증명하지 못했다. 군자란은 꽃이 없는 잎만으로는 시선을 끌지 못한다. 멋없이 쭉쭉 길게 뻗은 굵은 이파리는 먼지가 잘 앉아 주인의 게으름을 입증하기 쉬웠다. 시들시들 힘없이 늘어지는 화초가 완경을 한 주인을 닮은 것 같다.


엄마 돌아가시고 들고 온 군자란은 우리 집에 온 그해 봄, 화려한 주황색 꽃을 활짝 피웠다. 관엽만 가득하던 칙칙한 거실에 핀 꽃은 생기 있는 모습으로 가족의 사랑을 받았다. 군자란 화분은 그전에도 얻어온 적이 있는데 그 또한 한번 꽃을 피운 후 장렬히 전사했다. 분갈이를 잘못해서 그런 것인지 애석하기 짝이 없다.



생각해 보니 엄마 계실 적에도 친정에 가면 가끔 탐나는 화초를 몇 개 들고 오기도 했다. 보라색 작고 귀여운 바이올렛은 결혼 전에 성당에서 받아온 것이었는데, 엄마는 마법사처럼 바이올렛 화분 하나를 몇 개로 번식시켜서 나눠주기도 했다. 나도 그중 한 개를 얻어왔는데, 우리 집에만 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꽃이 떨어지고 이후로 다시는 꽃을 피우지 못했다. 바이올렛은 잎에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두꺼운데, 잎에 물이 묻고 그 상태로 햇볕을 받으면 시들어 버린다. 항상 물이 묻지 않도록 흙 위에 물을 주면서 조심했건만, 바이올렛은 나에게 다시는 꽃을 보여주지 않고 잎만 생생했다. 그러다 나중엔 잎도 시들어 버렸을 것이다.


엄마가 기르던 제주도 산 문주란도 화분이 몇 개나 되어서 한두 개 업어왔다. 아마 이것도 우리 집에 와서 한두 번은 꽃을 피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국화처럼 하얗고 향기로운 꽃을. 문주란도 잎은 오래 살아있었으나 꽃은 잘 보여주지 않고 나중엔 영양 부족인지 시들시들해서 정리되고 말았다. 그들의 처음은 아름다웠으나 끝은 미미했다. 리즈 시절에 데려온 화초들은 주인을 잘못 만나 금세 내리막길을 걷게 되어버렸다.


꽃을 좋아하기에 잘 기르기 위해 한때는 화초 수첩도 만들어 생육환경이라든가 재배 방법에 대해 메모를 하고, 인터넷으로 검색도 하고 엄마나 지인들에게 묻기도 했는데 잘되지 않았다. 식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는데, 화초에 무관심하고 게을렀던 탓이리라. 액비나 병충해 약을 사기는 해도 잘 주지 않았고 물 주기나 환기도 부지런히 해주지 못했다. 겨울에 잠깐 환기시키다 얼려 죽인 화초도 더러 있었다.

엄마는 너무 물을 자주 줘서 탈이었고, 계란 껍데기를 부셔서 화분 위에 거름으로 주기도 하셨다. 인공적인 비료나 약을 치지 않고도 잘 기르고 꽃도 잘 피우는 엄마의 정원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 외에도 제라늄, 꽃기린, 게발선인장마저 친정집에서 우리 집으로 옮겨와 유명을 달리했다. 메마르고 건조한 새 주인을 만나 화초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과 부지런한 주인의 손길을 그리워하다 시름시름 돌아갔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 집에 화분은 5개고 모두 관엽이나 통통한 스투키다. 엄마가 남기고 간 식물을 잘 길러서, 엄마를 보듯 화초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던 우리 엄마의 마음속엔 사시사철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거인의 정원'이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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