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ther round'를 보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자칭 애주가에 타칭 알코올 중독이었다. 젊은 시절에도 그렇게나 술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연세가 드셔서는 술을 많이 드신 다음날 몸이 아파서 결근을 하실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나는 지금도 남편이 술독에 빠져 다음날 출근 못 하겠다고 드러누워 있으면 억지로 깨워서 일단 출근한 후 조퇴하라고 한다. 술 마시는 사람이 싫어서 결혼도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친정아버지와 비슷하게 몸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시는 남자를 만났다. 인생유전인가.
아버지는 술 이외 딱히 다른 취미가 없으셨다. 술 마시고 친구 만나고, 그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다. 퇴직하시고 난 다음에는 집에서 엎드려 누워 텔레비전을 보다가 반주 한잔 하고, 아니면 친구를 만나 술 마시며 소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퇴직금이 다 떨어져 가고 자식에게 의지하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왜 이렇게 안 죽는지 모르겠다, 사는 게 지겹다'라고 푸념하셨다. 퇴직하시고 20년 조금 넘게 그렇게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사는 게 지겹다는 말에 대하여. 젊을 때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너무 무기력해 보이고, 서예도 배우고 친구들도 만나고 소일거리를 찾아서 하시는 어머니에 비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나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반면교사였다.
시간이 지나 나도 나이가 드니 '사는 게 지겹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주변에 만날 사람도 많이 없고, 한때는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겼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은 여행과 가끔 읽는 책과 영화 보기, 가뭄에 콩 나듯이 하는 운동과 글쓰기가 전부이다. 찾아보면 즐길 거리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사는 게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주 5일 출근을 해야 되고 살림을 해야 되고 애들을 보살펴야 되니까.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해서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곳에 항상 갈 수도 없고, 하고 싶은 일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못하게 될 때가 더 많으니. 비슷한 생활을 오래 계속하다 보면 지겨움이 권태로 탈바꿈해 허전한 마음을 파고드는 것이다.
얼마 전에 덴마크 영화 '어나더 라운드(Another round)'를 봤다. 니콜라이와 3명의 중년 남자 교사들은 어느 철학자의 '인간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 부족하다'라는 말에 착안하여 근무시간에 술을 마심으로써 나타나는 변화를 실험하기로 한다. 의외로 약간의 알코올 섭취는 영감을 주어 아이들을 집중시키는 흥미로운 수업을 하게 하고,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가족과의 관계도 변화시킨다.
그들의 실험정신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적정한 혈중 알코올 농도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점점 알코올을 많이 탐닉하게 되고, 급기야는 한 친구가 삶을 포기하게 되기에 이른다. 영화니까 마지막은 훈훈하게 끝났다. 적어도 남은 세 명은.
적당한 알코올은 삶을 즐겁게 하지만, 그 적절한 수준을 유지하는 자제력을 발휘하기가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한 잔만 더 마시려고 했는데, 나중엔 술이 술을 마시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맥주 한두 캔이 주량이고 술을 마시면 얼굴이 빨개져서 밖에서는 잘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외롭고 우울한 기분이 들면 혼자 영화를 보며 맥주 캔을 따거나 와인 한두 잔을 마신다. 그러면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술은 마실수록 조금 늘긴 하더라. 나의 '기분 부전증'에 스스로 알코올을 처방한 것이라고나 할까. 이것이 알코올 중독으로 가는 지름길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많이 마시고 자주 마시는 것이 아닐지라도 알코올에 의존하는 나의 마음은 스스로 한심하게 여겨진다.
오늘밤도 가볍게 와인 한 잔과 과자 한 봉지를 다 해치웠다. 그리고 뱃살과 에세이 한 편을 덤으로 얻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 한 잔을 더 마실까 고민을 했지만 내일 일정이 있어서 참아야겠다. 아직 나는 알코올을 제어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알콜중독 #약간의취기는인생을견디게한다 #어나더라운드
*사진 출처: © viniciusamano,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