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쓰고 고모가 그린 육아일기 1
아침부터 짜증이 확 밀려와서 소리쳐서 혼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온라인 수업을 옆에서 도와주다 보면, 답답하거나 화나거나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선생님이 지켜보는 카메라만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아이의 행동을 그 자리에서 바로 고쳐줬을 거다. 오늘도 아이는 선생님의 간단한 요구에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꼭 토를 달았다.
“이 문장 좀 한 번 읽어 볼래?”
“선생님, 대답하기 전에 질문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뭔데? 말해 봐.”
“근데 이걸 왜 저한테 시키세요?”
내가 뜨악하게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아이는 그게 뭐가 이상하냐는 듯이 나를 뚫어지게 노려봤다. 아이와 나는 책상 위 컴퓨터를 사이에 두고 팽팽한 기 싸움을 벌였다. 선생님의 재빠른 대답만 아니었으면 우리의 신경전은 장기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네 목소리를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잖아. 너의 낭랑한 목소리로 친구들 앞에서 한번 읽어 볼래?”
아이의 당돌한 질문에도 선생님은 당황하거나 화내지도 않고 능숙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선생님의 친절한 반응에 놀란 건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분명히 아이를 혼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질문을 대화로 이어가는 상황이 생소했다.
내가 지나치게 과민반응을 한 걸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생생한 기억은 없지만, 그런 반응은 잘못된 행동으로 내 마음속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지 않고 당돌하게 다른 질문으로 맞받아치는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고 혼나곤 했었다. 그 시절에는 말로만 끝나지 않았고 체벌로 이어지는 일도 예사였다. 그래서 몸서리치듯이 두렵고 강하게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미국 학교 선생님이라 그런가? 4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탓일까? 온라인 수업을 옆에서 참관하는 부모 때문에 선생님이 더욱 신경을 쓰기 때문일까? 이유야 어떻든지 나는 아이의 말대답에 성실히 응대하는 선생님의 태도를 지켜본 후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었다.
온라인 수업에서 다른 아이들도 비슷하게 말대답을 하는 걸 그 후로도 자주 목격했다. 이걸 왜 배워야 하냐고 따져서 묻는 도발적인 아이도 있었으니 우리 아이는 심각한 축에 들지도 않는 셈이었다. 놀랍게도 선생님은 학생들이 하는 대담한 질문들을 재치 있게 다른 질문으로 받아넘기며 수업을 이어갔다. 그걸 줄곧 긴장하며 지켜보는 내가 이상한 거였다.
아이의 말대답은 수업 시간뿐만이 아니었다. 간단한 요구에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이불 개기, 방 청소 같은 아주 일상적인 일에도 말대꾸로 응답하며 그걸 왜 해야 하는지 꼬박꼬박 따져서 물었다. 처음에는 제발 그냥 좀 하라고 윽박지르거나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내가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줄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엄마나 아빠한테 한 번도 지지 않으려고 하는 말다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말대답하는 아이를 어떻게 고쳐야 할까? 언성이 높아지는 날이 많아지자 지쳐가는 건 아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갈등을 풀어갈 실마리를 찾아 육아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호분 소아 정신과 전문의는 “미운 네 살과 죽이고 싶은 일곱 살, 우리 아이들이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간다는 발달의 건강한 지표다”라고 말했다.
아이의 나이가 만 여섯 살이고 한국 나이로 치면 일곱 살이 되었다. 아,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구나! 아이 심리 발달 과정이 그랬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네 살이 되던 무렵에도 위기가 찾아왔었다. 무조건 ‘싫다,’ ‘안돼’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아이가 통제하려는 부모와 자주 다투게 되는 건 아주 정상이라는 거다.
아이의 말대답도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자아 표현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아이만 나무란다고 해결될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아이의 발달 과정을 무시하고 제대로 들어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많은 말대답 중에는 정말 궁금해서 하는 질문도 있었을 것이다. 자아가 생기면서 질문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나도 시도 때도 없이 엄마한테 다 물어보는 호기심 많은 어린이였던 적이 있었다. 질문도 못 하게 막았으니 아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질문을 너무 무례하지 않게 표현하는 법을 몰랐던 것뿐이다.
개인적으로 예의 바르고 순종적이지만 자기 생각이 없는 아이와 무례하지만 자기 생각이 확실한 아이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후자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의가 있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지만 자기 생각이 없는 아이가 더욱더 끔찍하다.
자기 주관이 명확한 아이한테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자기 생각을 심어주는 일이 훨씬 어렵다. 아이가 생각만 잘할 줄 알면 예의라는 걸 왜 지켜야 하는지 조금만 설명해줘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 아이가 기계적으로 친절한 멘트만 던지는 로봇처럼 자라길 바라는 부모가 있을까.
육아 전문가들은 “갈등은 문제가 아니라 기회”라고 얘기한다. 그걸 기회로 삼아서 옳고 그른 걸 친절하게 설명해주면 아이가 잊어버리지 않고 잘 배우기 때문이다. 그게 말이 쉽지 직접 실천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잦은 말대답에도 화내지 않고 받아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불쑥 화가 나는 걸 잠재우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아이가 목욕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다가 혼잣말을 불쑥 내뱉었다.
“더 좋은 부모를 갖고 싶어.”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심호흡으로 간신히 가라앉히고 아이한테 물었다.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야?”
“……”
“괜찮으니까 말해봐.”
“……”
“네가 얘기해야지 우리가 알지?”
“닌텐도 게임 시간을 무한정 주는 부모요…”
“게임 시간이 많이 부족해?”
“온종일 게임만 하고 싶어요.”
“하루 종일 게임만 하면 학교 공부는 언제 해?”
“게임 말고 다른 건 다 시시해!”
아이의 하소연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목욕 시간은 갑자기 성토 대회장이 되었다. 아이의 불만을 들어주기 시작하니까 대화는 계속할 수 있었다. 하고 싶었던 얘기가 많았는지 그날은 자기 전 침대에서도 불만 사항을 속사포처럼 내 귀에 쏘아댔다. 그동안 내가 너무 듣지 않고 훈계나 지시만 했었나? 아이의 말대답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경직된 태도가 더 큰 문제였을까? 아이가 말을 하고 싶어도 내가 듣지 않으면 대화가 될 리가 없다.
말대답하는 버릇을 잡고 예의를 가르치는 일에도 순서가 있다. 일단 내가 먼저 귀를 열고 들어줘야 한다. 한 살이라도 많은 부모가 먼저 들어줘야지 아이가 먼저 듣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내가 만 여섯 살 어린이의 인지 능력을 과대평가했었다.
대화의 통로가 막히면 아이의 반항은 더 거세어질 거다. 나는 또 그걸 고치겠다고 더욱 강경한 태도와 위협으로 누르려고 할 거다. 아이가 질문과 반발 속에서 해답을 찾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부모가 인내심을 갖고 아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려줘야 한다. 내가 과연 그 역할을 다한 부모였을까?
미운 일곱 살이 아닌 나를 찾아가는 일곱 살이다. 아이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질문이 많은 건 당연하다. 나도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야 직성이 풀린다. 내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도 자신한테 묻지도 않으면 자아 정체성이 없는 거나 진배없다. 아이들은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세상을 배우고 성장한다.
나는 공부가 하기 싫고 게임만 하고 싶은 일곱 살 아이의 볼멘소리를 반항으로 속단하고 잔소리만 해대는 아빠였다. 아이는 왜 게임 대신에 공부해야 하는지가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을 수도 있다. 나는 아이를 말 잘 듣는 아이로 ‘빨리’ 키우고 싶었다. 생활 습관이나 태도가 옳은지 그른지를 알려주기 전에 한 박자 늦추고 아이의 의견을 먼저 들어보기로 했다. 사소한 아이의 의견도 경청하는 인자한 부모가 되어보려고 마음먹었다.
1학년 온라인 수업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선생님이 다음 주부터 리뷰 쓰기를 가르칠 거라고 얘기했다. 선생님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이 소나기처럼 질문을 마구 쏟아내 온라인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자주 가던 공원, 놀이동산, 식당에 관해 써도 좋으니까, 주말에 뭐로 쓸 건지 생각해봐.”
“정말 뭐든지 써도 돼요?”
“아무거나 다 괜찮아.”
“엄마 요리를 리뷰할래요.”
“선생님을 리뷰해도 돼요?”
“제 동생을 리뷰해도 괜찮아요?”
“저는 아빠 할래요.”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 그림 류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