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을 달리면서

by 전우 호떡

메마른 대지와 식생을 적시는 비가 내렸다. 가을에서 겨울로 건너가는 길목, 계절의 숨결은 잔잔한 빗방울로 창밖에 떨어졌다. 차창에 부딪히는 빗소리는 낮 동안의 침묵을 깨며 운율을 만들었고, 그 소리는 내 안의 고요한 혼잣말처럼 오후 내내 함께했다.

오후 5시 반을 넘기자 해는 이미 저물어 있었다. 어둠은 빠르게 퍼졌다. 낮 동안 사무실에서 나는 풀리지 않는 고민에 매달려 있었다. 머릿속은 가볍지 않았고, 마음속은 눅눅했다. 무뎌진 기운을 떨치기 위해 나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어떤 도구도 지니지 않은 채, 가장 가볍게 입고는 문을 나섰다.

낮 동안 해가 세상을 모두 담아두었지만, 지금은 어둠 속에 스케치된 윤곽만이 선명했다. 가로등 불빛은 엷게 퍼져 나와 주변 공간을 밀착시켰고, 나는 그 빛의 테두리 안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터벅터벅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둠 속에 발걸음은 처음엔 조심스럽고 묵직했지만, 곧 여백을 채우듯 가벼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나는 어둠 속에서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비에 젖은 아스콘 포장도로와 운동화 바닥은 미끄러지듯 스쳤다가 다시 붙었고, 흙냄새가 스며들어 코끝에 와닿았다.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를 타고 전신에 흘렀다. 낮 동안의 시름하던 기운과 소음은 멀어졌고, 나는 자연과 가까워지면서 나 자신과 더 가까워졌다.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엔 ‘사랑하는 안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비 온다더니 춥지 않나요,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요!” 간결했지만, 그 속엔 익숙한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괜찮다며 큰 웃음과 함께 고마움을 전했다. 가족의 온기는 나를 받쳐주는 버팀목이다. 어릴 적, 비 오는 날이면 집에서 내가 아주 어릴 때 이야기와 친척들이 살아왔던 이야기 등을 해 주시고는 지루하지 않게 달래 주시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 목소리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투병 중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느 겨울밤엔 전화하셨다. “춥지! 보일러 잘 돌리고, 집안도 그렇고 따뜻하게 하고 다녀라.” 항상 먼저 자식들의 안위를 걱정하셨다. “열심히 살아라. 최선을 다해 힘써라!” 이런 말들이 아닌 늘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하시며 챙겨주시던 아버지의 사랑을 그려보았다.

나는 공간 속으로 움직였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여백을 채우고는 곧장 다른 여백으로 이동하면서,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나는 빨라지고 있었다. 그들의 말과 기억이 내 속도를 이끌었다. 공간의 변화는 내 안의 속도를 끌어올렸고, 나는 그 속도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했다. 그리고 그 발견 속엔, 늘 곁에 있었던 부모님의 보살핌과 가족의 사랑이 함께 있었다.


'안해'

1. '아내'의 옛말로, 고전 문헌이나 고어에서 주로 사용된 표현입니다.

2. 현대에는 일상적으로 잘 쓰이지 않으며, 주로 역사적 기록이나 문학 작품에서 등장합니다.

3. 아내의 북한 말

작가의 이전글걷고 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