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고단함으로

by 전우 호떡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저녁이면, 적막이 방 안에 먼저 도착해 있다. 그래서 나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고, 때로는 키보드를 두드려 편지를 쓰며 멀리 있는 이들의 온기를 되살려낸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떨어져 있기에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마음의 연결이 있다. 다른 도시에서 각자의 하루를 살아내는 아내와 두 딸에게 안부를 전하는 이 짧은 시간은, 비록 몸은 홀로일지라도 ‘가정’이라는 안식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이다. 그렇게 매일의 고단함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행복이 잔잔히 밀려온다.


아이들이 자라며 아팠던 순간들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첫째를 키울 때는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그러나 둘째는 큰 걱정 없이 잘 자라주어 마음이 놓이곤 했다. 아내를 닮아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는 아이였다. 그럼에도 둘째와 관련된 몇 번의 병원행은 지금도 가슴 깊숙이 남아 있다.


둘째가 세 살이던 어느 겨울밤, 갑작스러운 고열로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나는 깊이 잠든 채였지만, 아내는 아이의 체온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찬 물수건으로 열을 내리려 애썼지만 떨어지지 않는 열 앞에 결국 우리는 새벽길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잠든 첫째를 집에 두고 나는 운전대를 잡고, 아내는 아이를 안고 응급실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는 토악질을 시작했고, 저녁에 먹은 음식을 모두 쏟아냈다. 세 살이었지만 말을 잃을 만큼 고통스러웠는지 그저 낮은 신음만 내뱉었다. 검사 결과는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아내는 아이의 곁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흐느꼈고, 나 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행히 아침 무렵 열이 가라앉아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큰일은 둘째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치과에서 발견된 이상 치아 두 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하나는 앞니 뒤쪽에서 옆으로 누워 자라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치아와 코 사이 깊숙한 곳에서 자라 전신마취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의 얼굴에는 걱정이 짙게 드리워졌고, 나 역시 마음 한쪽이 시큰했지만 “괜찮을 거야”라는 말로 서로를 붙들었다.


수술 당일, 나는 출근해야 했고 아내와 둘째만 병원에 갔다. 아내의 목소리는 떨려 있었지만, 둘째는 “잘 받고 올게요”라며 손을 흔들었다 한다. 어린 마음에도 가족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의젓함이 서려 있었다. 다행히 수술은 순조로웠고 그날 오후 바로 퇴원할 수 있었다. 마취에서 깨어난 둘째는 입천장에 의료보조기구를 단 채 아픈 기색을 숨기고 있었다. 그 조용한 씩씩함에 나는 ‘벌써 이렇게 자랐구나’ 하는 감사를 느꼈다.


지금은 좋은 의료시설이 가까이 있지만, 내가 어릴 때는 그렇지 않았다. 차도, 휴대전화도, 변변한 병원도 없는 시골에서 할머니와 부모님은 우리 형제를 어떻게 돌보셨을까. 돌이켜보면 그 고생을 헤아릴 수조차 없다.


어릴 적 나는 생손앓이로 밤새 울곤 했고, 할머니는 나를 등에 업은 채 꼬박 밤을 새우셨다. 초등학생이었던 내 몸은 분명 무거웠을 텐데도, 할머니는 내 울음을 달래며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조용히 빌어주셨다. 할머니와 나눈 대화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도, 그 품의 따뜻함은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걸린 대상포진도 잊기 어렵다. 입안과 얼굴, 머리까지 퍼진 수포로 한 달 가까이 학교에 가지 못했다. 동네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지 못했고, 어머니는 여러 병원을 돌며 해결책을 찾으셨다. 나의 고통은 어머니를 더 아프게 했던 모양이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다 놓으시며 조금이라도 힘이 되려 하셨다. 밤이면 말동무가 되어 주시고, 아침이면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던 어머니의 손길이 병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친구들이 병문안을 와 밤길을 서슴지 않고 집을 찾아준 일도 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급히 먹거리를 사와 정성껏 대접하셨다. 어머니의 그 분주한 뒷모습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였고, 그날의 따스함은 아직도 선명하다.


어머니는 늘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배가 아프다 하면 사이다를 사 오고, 시험을 앞두면 부엌에서 조용히 두 손을 모아 자식들의 앞날을 빌었다. 어느 날, 우연히 방문을 열었다가 무릎을 꿇은 채 나를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장면은 세월 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나의 마음 한구석을 늘 밝히는 등불 같다.


지금도 어머니는 먼저 전화를 걸어 계절이 바뀌는 속도에 맞춰 내 안부를 묻는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방은 따뜻하냐? 저녁은 먹었냐? 퇴근했으면 일찍 들어가 쉬어라.” 그 따뜻한 목소리만으로도, 우리는 비록 멀리 있어도 같은 시간과 공간에 맞닿아 있는 듯하다.


가족이 서로에게 온기를 건네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 그리고 내가 지금의 가정을 이루고 있는 이유에는 어머니의 고단한 삶이 자리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서로 다르게 흐르는 곳에서 살아가더라도, 가족이 늘 함께 있다고 느끼는 힘은 결국 어머니가 물려준 사랑에서 비롯된다.



2021년 가을에 고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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