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세상은 잿빛에 잠겨 있었다. 장대비가 한차례 세차게 쏟아지더니 곧 그쳤다. 아내와 반나절을 도서관에서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연애 시절 자주 나누어 먹던 팥빙수의 달콤함을 다시 맛보았다. 집에 돌아오니 어느새 해는 중천을 훌쩍 넘어 있었다. 이런저런 집안일을 하다 창을 열어보니, 비 갠 오후의 세상은 은빛으로 변해 제 모습을 희미하게 감추고 있었다. 며칠간의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는 선선한 바람이 고마웠다. 불현듯 가을의 기운이 성큼 다가와 나를 다시 밖으로 불러내는 듯했다.
며칠 전부터 허리 통증으로 마음껏 움직이지 못했지만, 충분히 쉬었으니, 오늘은 달려보리라 다짐했다. 비 갠 뒤 맑고 깨끗해진 풍경이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현관을 나서는 나를 보고 아내가 걱정스레 당부한다. “허리도 불편한데, 오늘은 뛰지 말고 걸어요. 무리하지 말고요.” “조금만 달리고 올게요.” 나는 웃으며 안심시켰다.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척추와 맞닿은 허리가 무거워 속도를 낼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장대비가 씻어낸 풍경을 찬찬히 바라보고 싶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여러 생각이 따라와 호흡조차 잊곤 했다. 천천히 달리면서 숨을 고르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를 못 느꼈고,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에 내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천천히 달리며 풍경 속에 나를 맡겼다.
시간과 공간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를 맞아주었다. 움직임 속에서 나는 정해진 길 위에 있었고, 그 길은 자연스레 나를 예정된 시간과 공간으로 이끌었다. 시간과 공간!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었으나, 분명 나는 시간과 공간과 더불어 움직이고 있었다. 일상에서 얽히고설킨 크고 작은 생각과 관계들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은빛을 띤 하늘, 빛이 옅어진 들녘, 선선히 스쳐가는 바람이 엉킨 마음의 매듭을 하나둘 풀어주었다.
달리며 흘린 땀을 식혀줄 곳, 젖은 몸을 말려줄 곳을 떠올리자,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집이 그려졌다. 늘 아내는 나를 기다려 주었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자칫 절제하지 못할 때 길을 잡아주던 이도 언제나 아내였다. 건강검진에서 이상 신호가 보이자마자 식단을 조율하고 약을 챙겨주던 모습이 겹쳐졌다. 가을의 문턱, 선선한 바람 속에서 나는 천천히 달리며 다시금 아내의 보살핌과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다. 비 온 뒤 찾아온 맑고 서늘한 바람은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을 어느새 활짝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