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by 전우 호떡

엊그제 선배 한 분이 오랜만에 반갑게 전화하며 안부를 전했다. 지금 동료들과 식사 중이라 괜찮으시면 오시라고 했더니 나의 기대와는 달리, 잠시 후 선배님은 정말 오셨다. 동료들이 함께 있으니 식사만 하시고 바로 가셨다. 늦은 시각 잠들 무렵 선배님은 집에 잘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셨다. 식사 후에 잘 들어갔다는 인사는 우리 사이에 평범하지 않았으므로 연락한 건 아마도 내게 용건이 있어서임을 알아차렸다. 답장했더니 이윽고 내일 잠깐 볼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셨다. 선배님은 늦은 오후에 사무실로 찾아오셨고, 그동안 살아왔던, 그리고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었다.

선배님은 잠시 후 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꺼내며 내게 주셨다. 선배님은 오래전에 내가 드린 수필을 선배님의 어머님께 드렸다고 했다. 그 편지는 어머님께서 내가 드린 수필에 대한 소감과 함께 고마움의 뜻으로 보내셨던 것이었다. 선배님은 그 편지를 수개월 전에 어머님으로부터 받았었는데, 그간 바빠서 나에게 전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선배님은 참 미안해했다. 그 편지를 읽었을 때 깊고 가득한 선한 에너지가 햇살처럼 나를 안아 감싸는 기분이었다. 수필을 드리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님은 서점에 가서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화’를 중점으로 다룬 내용의 책을 고르셔서 선배를 통해 선물로 주셨는데, 그러고 보면 수필을 읽고 나서 책을 선물해 주시고 이윽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편지를 쓰셨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참으로 온몸과 온 마음으로 살아오신 님께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는 탄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행복의 보금자리인 가정과 가족에 대한 진지한 사랑과 배려와 노력, 국토방위의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느라 혼신의 노력을 바치시는 늠름한 자세! 또한, 그 무엇보다도 자연과 사람과 자기 자신을 아끼고 성숙시키느라 깨어 있는 숙연한 모습!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그동안 달려오신 발자취에서 아들의 발자취를 흠칫 재발견하고 그 어미로서 형언할 수 없이 감개무량했습니다. 님께 주님의 사랑과 평화와 기쁨이 넘치기를 늘 빌겠습니다.”

함께했던 주변의 고마운 분들께 내가 쓴 수필을 엮어 선물로 드렸을 때 몇몇 분이 소감을 전했었는데, 이처럼 감동을 주는 장문의 소감을 받아보니 나의 인격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부족한 글솜씨에 과분한 칭찬을 주셔서 황송할 따름이었다. 이제 여든을 넘긴 연세임에도 힘찬 필체를 타고 정성이 가득한 내용에 사랑과 평안의 기운이 전해져 행복은 실로 누군가로부터 깊은 관심과 응원을 받는 관계에 있지 않나 생각하며 감격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고 보면 선배님과의 인연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같이 근무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중간중간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만남을 가졌기에 인연은 그리 길고도 깊었다. 며칠 전 만남에서 열심히 듣고, 질문을 이어가며 말하고 듣고를 반복해 시간이 가는지 몰랐다. 2시간여 동안 대화했지만, 온종일 같이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서로에게 집중하며 귀 기울였었다. 누군가에 기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위안이 되고 그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기에 존재만으로 위로되는 선배님은 내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선배님은 결혼을 앞두고 나에게 결혼식에 참석해서 예식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하셨다. 흔쾌히 그러겠노라 말씀드리고 선배님의 결혼식에서 일역을 담당했다. 결혼식에서 주례 대신 선배님의 어머님께서 축사를 해주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결혼식이 주례보다 부모님의 덕담이나 지인의 축사로 꾸며진다고 들었던 터였지만, 나는 생애 처음으로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특히 곱게 차려입은 한복과 단발을 하신 어머님은 전통적인 여성상처럼 단아하셨다. 어머님의 말씀을 들으며 전통적인 아름다움과 동시에 세련되고 주체적인 신지식인의 인상이 깊이 새겨졌었다. 어머님의 축사는 지금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아들과 이제 새 식구로 맞아들이는 며느리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결혼 생활에 대한 따뜻한 조언이 담겨 있었다. 어머님의 진솔한 축사는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뭉클하게 다가온 감동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예식이 끝나고 선배님은 예식에 참석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정성스럽게 편지를 써주셨다. 돌아오는 길에 감명 깊게 읽던 기억이 난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몇 번이나 계속 읽으며 감회에 젖었었다. 편지에는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시작해서 결혼식에 참석해 준 고마움과 나의 건강과 행복에 대한 소망이 적혀 있었다.

한 번은 내가 큰일을 겪었을 때 며칠 후 선배님은 먼저 연락하시며 위로해 주셨다. 갑작스럽게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나에게 차마 연락하지 못하고 걱정만 하다가 용기를 내었다며 괜찮은지 위로를 보내셨다. 그리고 얼마 후에 찾아오셔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리라 생각지도 못했다고 안타까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일을 당한 사람은 나였지만, 더 안타까워하시며 염려하는 사람은 선배님이셨다. 선배님의 진심 어린 마음을 읽으며 나는 괜찮다며 했지만, 선배님께 울지 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감정은 부탁으로 조절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말없이 서로에게 기대며 의지했었다.

선배님과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지만, 지속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의 주요한 국면에서 만난 기억은 강렬하고도 늘 신선하게 남아 있다. 일상적인 관계에서 서로의 실리를 고려하지 않았다. 선배님과의 만남은 인간적으로 서로가 편해서, 마음이 가는 대로 이끌려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몇 년에 한 번씩 만나 중간의 공백을 메울 수 있어서 지금도 굉장히 가깝게 느껴진다. 우리는 서로 어려울 때나 힘들 때 고통이 다가올 때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고, 그저 가능할 때 만나 서로에 대해 일상을 나누었다. 은은하지만 깊은 만남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서로에게 부담되지 않은 채 가능할 때 서로에게 기대며 그렇게 이어지고 있어 함께하는 따뜻한 선배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2022년 여름 고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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