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나 길을 나서면, 집 생각이 쉽게 떠나지 않는다. 몸은 멀어져도 마음 한켠에는 늘 가족이 머문다.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고,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더해진다.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만큼, 그리움과 염려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자녀가 태어나면서 가정의 중심은 자연스레 아이에게로 옮겨간다. 아이가 자라며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신의 세계를 넓혀간다. 그럴수록 부모와 함께했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어느 순간 그 기억들이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늘 곁에 있을 것만 같던 아이는 어느새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
어릴 적, 엄마 품을 한시도 떠나지 않던 첫째는 이제 친지 집에 며칠씩 머물다 오기도 한다. 학교를 다니며 생각도 깊어지고, 부모를 대하는 태도 또한 달라졌다. 아이는 그렇게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자라고 있다.
출장을 떠나 있던 어느 날, 첫째와 둘째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이번 출장 때는 우리 아무것도 필요 없어. 선물 사지 말고 아빠 사고 싶은 거 사 와.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건강하게 지내!”
그 말이 고맙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이들은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나 내 손에 들린 것은 출장 가방뿐이었다.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아내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아무것도 안 사 오면 어떡해요”라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나는 태연한 척 “바빠서 살 시간이 없었어. 미안해”라고 말하며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준비해 둔 선물들을 꺼냈다. 순간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럼 그렇지! 아빠가 어떤 사람인데!”
옆에서 아내도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혹시라도 정말 아무것도 안 사 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선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하나의 방식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천성은 못 속인다”는 말처럼, 첫째는 나의 예민한 성격을 닮았다. 시험을 앞두면 긴장으로 배가 아파 화장실을 들락거리기도 한다. 시험 한 달 전이 되면 집안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긴장감이 감돈다. 사소한 소음이나 불필요한 말도 조심하게 된다.
지난 추석에도 첫째가 집에서 공부하겠다고 해 당일로 본가와 처가를 다녀와야 했다. 부모님께는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손주가 먼저지”라며 이해해 주셨다. 그 말씀이 고맙고도 마음 한켠이 먹먹했다.
시험을 앞둔 첫째는 공부하다가 문득 눈물을 흘리곤 한다. 힘든 마음과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하다. 시험 첫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흐느낌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몇 문제 틀렸다는 이유로 “너무 많이 틀렸다”며 울고 있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첫째와 마주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빠, 시험 못 봐서 미안해. 내일은 잘 보고 웃고 싶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직 어린 나이에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한편으로는 나를 닮은 그 예민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세상은 생각보다 공평해. 네가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시험이 어려웠다면 다른 친구들도 다 어려웠을 거야. 너무 마음 쓰지 마.”
언제까지나 아기일 것 같던 아이는 어느새 중학생이 되어 꿈을 이야기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하다. 시험의 점수와 결과는 지금의 아이에게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인생은 늘 과정 속에 있다. 한 번의 결과로 모든 것이 결정되지 않는다. 잘된 일도 계속 이어지지 않을 수 있고,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가 오히려 더 좋은 길로 이어질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순간의 성과가 아니라, 꾸준히 쌓아가는 노력과 태도일 것이다.
둘째도 머지않아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시험과 경쟁 속에서 스스로를 시험받게 될 것이다. 삶은 단순하지 않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고, 성장하며, 때로는 기쁨과 감동을 느낀다.
아이들에게 인생을 말로 가르치기보다,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해주고 싶다. 첫째가 스스로의 예민함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며 조금 더 가볍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두 아이 모두 진실함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세상을 마주하며 담대하게 걸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 날, 시험 기간 중이던 딸이 조용히 다가왔다.
“아빠, 이번 시험 끝나면 엄마랑 아빠 하고 싶은 거 해. 나 때문에 한 달 동안 참았잖아. 미안해.”
그 한마디에 마음이 깊이 울렸다. 부모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