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남긴 문장들

by 전우 호떡

연구 실적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기록들을 다시 펼쳐 보게 되었다. 석사 시절의 학위 논문과 학술지에 실린 논문 한 편, 그리고 월간지에 실렸던 두 편의 글. 숫자로 세면 네 편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된 시간과 망설임, 그리고 우연처럼 찾아온 용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처음 발표를 하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나는 사람들 앞에 서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말은 쉽게 목에 걸렸고, 시선은 바닥으로 자주 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위관 시절의 과장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발표를 하면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이 단단해진다고.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말에는 오랜 시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날의 발표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듬해 또 한 번의 발표로 이어졌다. 그리고 발표를 확장해 쓴 글이 생겼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이 논문을 제외하고 내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글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지휘관 시절 정리했던 지휘 사례를 내 글쓰기의 시작이라 여겨 왔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다. 글은 이미 그 이전에, 발표 원고를 고치고 또 고치던 조용한 밤들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 그 기록을 다시 들춰보며, 모든 시작이 한 사람의 권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새삼 고개를 숙이게 된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오래전부터 내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초급장교 시절, 나는 리더십에 유독 관심이 많아 지휘 사례들을 유심히 읽곤 했다. 언젠가 지휘관이 된다면 전우들과의 시간을 기록으로 남겨 후배들에게 건네고 싶다는 다짐도 그 무렵 생겨났다. 지휘관 임기를 마친 뒤, 그 기억들을 정리해 응모했고 뜻밖에도 입상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이후에는 수필을 써 문인회에 응모했고, 신인상을 받으며 글이 내 삶의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나는 틈이 날 때마다 글을 썼다. 완성된 형태가 아니어도 좋았다. 조각처럼 흩어진 문장들을 모으는 일만으로도 충분했다. 수필과 시는 그렇게 내 일상에 스며들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글쓰기가 사람을 정확하게 만든다고 했다. 생각을 적고, 다시 읽고, 고쳐 쓰는 동안 생각은 자연스레 정제되었고, 나는 그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조금 더 또렷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작년 어느 날, 시골 마을을 달리며 같은 길을 세 번이나 오갔다. 풍경과 사람들의 숨결을 놓치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써 내려간 글이 「다시 달리면서」였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마음에 들었고, 이보다 더 좋은 달리기 글은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저수지를 감아 도는 길 위에서 또 다른 글이 태어났다. 「저수지를 감아 돌면서」라는 제목을 붙인 그 글은, 나에게 이전보다 더 깊은 여운을 남겼다. 글은 늘 그렇게, 스스로 한계를 정해 놓은 마음을 조용히 넘어선다.


글은 생각을 드러내고, 생각은 결국 사람을 비춘다. 나는 글을 쓰며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베이컨의 또 다른 말처럼, 골똘히 짜내지 않은 순간의 생각들이 오히려 가장 오래 남는다. 특별한 시간을 마련하지 않아도, 일상의 한 장면을 붙잡아 적어 두는 일만으로도 글은 시작된다.


내가 쓴 글들이 역시 그러하다. 거창한 사건도, 극적인 삶도 없다. 다만 하루를 정직하게 살아가며 지나쳐 온 풍경과 사람, 그리고 그때그때 마음에 스친 생각들이 조용히 모여 있을 뿐이다. 이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여백이 되기를, 그리고 각자의 일상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024년 6월 대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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