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온 가족이 마을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 다녀왔다. 무더위를 식혀줄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곳에서 책을 보자고 하니 아이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도서관에 모인 사람들을 넌지시 둘러본다. 작은 공간에 열 명 남짓, 학생과 어른이 반반이다. 수험생은 시험문제를 풀고, 취업을 준비하는 어른은 자격증 책을 펼쳐 들고 있다. 모두가 각자의 내일을 준비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앉으니 고등학교 3년을 기숙사에서 지내며 3층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배고프고 춥고 어두운 시간이었지만, 지금의 나를 이끈 방향은 바로 그 시절에 정해졌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을,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한 도서관을 마음 깊이 고맙게 여기고 있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돈을 내고 다니는 독서실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숙사가 2층, 도서관이 바로 위 3층에 있었기에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도서관을 이용하며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었지만, 환경은 썩 좋지 않았다. 여름에는 더웠고 겨울에는 추웠다. 대형 선풍기 소리와 라디에이터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도서관의 고요를 깨곤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소리들은 집중을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부하는 기운을 이어주는 배경음처럼 느껴졌다.
넓은 공간에는 칸막이 없는 책상과 딱딱한 의자만 놓여 있었다. 책상은 두 팔을 펼치기에도 비좁았고, 의자는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저릴 만큼 불편했다. 시험 기간이 아니면 도서관은 늘 한산했고, 안에 있는 학생들을 한눈에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더위와 추위를 피해 기숙사와 교실,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했다.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아 자리를 옮기는 것이 나만의 방식이었다.
1학년 때, 공부를 잘하는 3학년 형들을 몇몇 알게 되었다. 전교 1등을 했다는 형이 도서관에서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연스레 그 형의 동선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또 다른 형은 도서관에 가방만 두고 다니는 듯 보였는데, 정작 공부하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함께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서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연대감이 생겼다. 그 형들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은 도서관으로 나를 계속 불러들이는 힘이 되었다.
도서관은 적막한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는 지식과 에너지, 그리고 치열한 삶의 의지가 끊임없이 생성된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욕구와 안일함을 밀어내고, 자기 자신과 싸우는 투쟁의 장이다.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미래를 그려간다. 그 과정에서 삶의 주도권을 조금씩 손에 쥐게 되고, 그 주도권은 다시 열정으로 이어진다.
언젠가 마흔 중반에 퇴직한 뒤 제2의 인생을 준비해 경력경쟁 채용 시험에 합격한 선배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늦은 나이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사흘만 지나면 처음 공부한 내용을 잊어버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2년 동안 집과 도서관만 오가며 책과 씨름했고, 설과 추석에도 가족을 고향에 보내고 혼자 남아 공부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할 수 있었던 힘은 도서관에서 마음을 다잡고 집중했던 시간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도서관에 앉아 있으니 고교 시절의 배고픔과 메마른 눈물이 떠올랐다. 용돈은 늘 빠듯했고, 밤늦게 밀려오는 허기를 간식으로 달래기엔 부족했다. 공부하다가 새벽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부모님과 떨어져 있는 처지가 서러워 조용히 눈물을 삼킨 적도 있었다. 그래도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기대 하나로 버텼고, 그 기대가 학업의 끈을 놓지 않게 했다.
통제된 수업과 야간 자율학습 환경 속에서도 나는 도서관, 교실, 기숙사를 오가며 나만의 공부 공간을 만들어갔다. 선택의 폭은 좁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하며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감각을 지켜냈다. 도서관을 드나들던 형들과의 보이지 않는 연대감은 지치지 않는 동력이 되었고, ‘내 선택으로 내 인생을 만들어간다’는 마음가짐은 학창 시절 내내 나를 붙들어주었다.
도서관은 나에게 주도권을 배우게 한 공간이자,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 준 연대의 장소였다. 희망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자신을 단련하던 수련의 도장이기도 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그 시절 도서관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2023년 6월 양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