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올 줄 알았던 순간의 이야기
고즈넉 하기도, 적막하기도 한 그곳을 걸었다.
오른편 저 멀리 보이는 논둑에서부터 흙 내음을 가득 실은 금빛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내 곁에 오기 전, 길을 따라 옆으로 흐르던 강바닥의 몽글몽글한 조약돌이 보일 만큼 얕은 도랑물을 스쳐 지나왔는데, 그 탓에 맑디 맑은 푸른 도랑물의 선선한 기운까지 함께 안고서 내 귀를, 내 머리칼을 간질였다.
어제 다녀온 절 앞마당에 심긴 아름드리나무의 높이 만한 폭의 도랑물이 일렁일 때마다 뽀송한 햇살이 이리저리 부서져 반짝였다.
시내로 가는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햇살을 눈을 찌푸려 피하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셨다. 그때마다, 할아버지의 깊이 패인 주름이 꼭 반박자 늦게 힘없이 움직였다. 가무 잡잡한 할아버지 얼굴보다 밝게 노란 지푸라기 몇 점을 공중에 들어 올렸다 놓으시며, ‘동남풍이구나’라고 중얼거리셨다. 우린 동으로 동으로 걷고 있었다.
우리가 걷는 길은 도랑물만큼이나 넓은 황토 흙 길이였다. 세월을 말해주듯 잘 다져진 흙길은 드문드문 난 잡초만큼 색이 바래 있었지만, 먼지 하나 나지 않는 것이 참 이상했다. 습기 하나 없이 잘 마른 맑은 날인데.
맞은편에선 흰 두루막에 갓을 쓴 두 사람과 중국 초상화에 나올법한 까맣고 구불구불한 곱슬 수염을 기른 이상한 중 두 사람이 오고 있었다.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부리부리한 눈이 선하게 나를 훑어봤다. 나는 그들이 우리가 온 곳으로 가고 있음을 알았는데, 그들은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듯했다. 우리는 동으로 동으로 걷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웃음을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평생을 유교로 무뚝뚝하신 분이셨다. 이런저런 애교로 할아버지 앞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손녀를 볼 때라치면, 가끔 코끝에 걸쳐진 오래된 금테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눈빛과 함께 흘김에 가까운 인자한 웃음을 지으셨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사춘기 소년이 비죽이 나는 웃음을 꾹 참는 것 같아, 나는 그것이 그렇게 좋았다.
- 할아버지, 이 도랑은 예전엔 이만큼이나 넓었나 봐요.
나는 지금 할아버지와 꿈속에서 과거 속을 걷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
- 할아버지 그럼 저 물속에 있는 큰 물고기 이름은 뭐예요.
- 백 송어
이름이 좋았다. 진짜 있는 이름인지도 모르겠을 그 이름을 입에 되뇌다,
- 할아부지, 할아부지 그럼 우리 저 물고기 낚시도 할 수 있어요?
어쩐지 나는 자꾸만 할아버지 댁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말투로 말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내가 지금 할아버지와 걷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래.
-잡아주세요오오 할아부지.
난 언제나 할아버지보다 할아부지가 좋았다. 모음 하나를 다른 곳에 두어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아무도 몰래 나의 할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마
-할아버지 우린 아직 준비가 안됐는데, 그 사람들 다시 올까요?
- 글쎄다.
- 할아버지 보러 온 사람들 맞죠?
- 그렇겠지.
- 아… 다음에 왔으면 좋겠는데… 오늘 말고.
오늘은 할아버지랑 걷고 싶단 말이에요,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라는 다음 말을 가만히 삼켰다.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할아버지 옆을 따라 걷는 나를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돌아다보셨다. 생애 중에 오늘, 가장 많은 말씀을 하신 할아버지는 정말 오랜만에 흘김 없는 미소를 지으시며, 걱정 말거라-라고 하셨다. 이상했다. 할아버지께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걱정하실까, 큰 걱정은 숨기곤, 작은 걱정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잘 될 거다-라는 위로보다는, 낭팰다-라는 말과 함께 인상을 찌푸리며 안경 너머로 나를 물끄러미 보시곤 했다. 그런 할아버지의 ‘걱정 말거라-‘라는 말씀은 어째 어색하면서도 다정하게 들렸다. 뒷짐을 진 채 나를 바라보시는 할아버지 뒤로, 초가지붕 지푸라기들이 강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은 할아부지를 십 년, 아니 이십 년쯤 젊어 보이게 했고, 자식이 아닌 손자가 아닌 손녀와 함께 걷는 할아부지의 모습이 그립듯 생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