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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호우 Nov 26. 2015

운수 좋은 아침.

운수 좋은 날 보고 있을 널 생각하며,

0. 방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뿌연 안개로 가득찬 회색도시에 차갑고 맑은 물방울들이 떨어진다. 빗소리에 어울리는 기타연주곡을 튼다. 박주원의 GYPSY CINEMA 앨범에 수록된 La Vita E Bella(인생은 아름다워). '차가운 인생도 아름다울 수 있겠지?' 스쳐지나가는 생각을 뒤로 하고 바리깡으로 옆머리를 민다. 이발사의 똑 떨어지는 재단 기술과는 거리가 먼 손짓이지만 후두둑 낙하하는 머리카락을 보니, 개운하다.


1. 복도

 문을 열고 나와 복도에 섰을 때, 나갈 때 절대 잊지말자고 아침 내내 생각했던 검정색의 긴 장우산이 생각난다. 운이 좋다. 하마터면 비를 맞으며 오늘 하루를 비관할 뻔했다. 머피의 법칙이니, 아홉수니 출처도 모를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우산을 챙겨서 다시 복도를 나와 계단을 내려간다. 표정은 없지만 생각은 많다.


2. 첫 번째 횡단보도

 복잡하게 꼬인 생각의 실타래는 우산 위로 떨어지는 탁탁거리는 소리 뒤로 밀려나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두 눈 앞에 파란불. 적어도 300초는 기다려야만 켜지던 파란색 불이 집을 나서자마자 마중나와 있다. 분명히 또 다른 실타래가 희미하게 나타나는 것 같았는데 탁탁거리며 뛰는 소리에 사라지고 없다.


3. 거리

 빗방울로 포장된 거리를 걷는다. 초점없는 눈으로 걸음을 옮긴다. 내 옆을 스쳐가는 사람. 아는 사람. 아는 사람이긴 하지만 굳이 인사를 하고 시덥잖은 안부를 나누는데에 나의 시간을 쓰기 아까운 그런 사람. 다행이다. 그 사람은 나를 못 봤고, 내가 그를 알아본건 나를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마음 편히 모른척 할 수 있다.


4. 담배

 습도가 높은 날 피우는 담배는 평소보다 진한 맛이 난다. 비 오는 거리를 걸으며 피우는 담배는 어둡고 습한 골목에서 피우는 담배보다는 왠지 호방하고 유쾌한 맛을 내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자제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행인이 없다. 다음 횡단보도까지 가는 길 내내 행인이 없다. 딱 한 명 있었는데, 알아도 모른 척 하고 싶은 지인이었기에 괜찮다(고 합리화 해버렸다).


5. 다음 횡단보도

 나는 매일 아침 국내 최대 5일장이 열리는 재래시장 앞 8차선 도로의 사거리를 건넌다. 이 도시에서도 가장 많은 교통량을 자랑하는 이 재래시장 사거리를 건너려면 30미터 쯤 되는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오늘도 30명 쯤 되는 사람들이 횡단보도 앞을 가득 메우고 있다. 서로 팔짱만 끼면 전경 시절에 밥먹듯 했던 스크럽 대형과 똑같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번에도 파란색 불이 마중나와 있었기에 스크럽 대형은 금새 무너졌으니까. 갈 길이 바쁜 발들은 주인을 태운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일제히 움직인다.


6. 버스

 길다란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에 도착하니, 오늘은 왠지 버스마저 나를 기다리고 있을거란 기대가 생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기대를 떨쳐낸다. 기대가 기대에서 그쳤을 때 찾아오는 실망감과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의 도리질에 나를 추월하던 여대생이 나를 흘깃 쳐다본다. 아닌가? 나를 흘깃 본 것이 아닌가? 나를 쳐다본 것도 아닌가? 여대생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니다. 아무도 없던 것 같기도 하다. 내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체감하고 있느라 정신이 없는데 저만치서 버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달리기 시작하자 배배꼬인 실타래가 툭 하고 도로 위로 떨어진다.


7. 버스 안

 삑-


너는 맨 뒷자리에 앉아있다.


난 말없이 그 옆에 가서 앉는다. 이런 운수 좋은  만난  지그시 바라본다.


적막.


내 몸집만큼 커다란 버스의 디젤 엔진 때문에 차창이 초조하게 떨린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 정지된 우리. 미동도 없이, 미소도 없이, 사라진 표정을 찾으려는 마음도 없이 우린 그렇게 달려간다. 멈춘 시간이 속절 없이 흐른다. 나는 이제 내려야 한다. 너는 내릴 기색조차 보이지 않지만 난 이미 뒷문 앞에 서 있다. 너를 쳐다보기가 두려워서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내렸다.


아차


삑-


8. 종착지

'아마 넌 이런 내 모습조차 보지 않았을테지...'.

이런 생각 덕분에 나는 실망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부르릉 거리며 떠나가는 버스 안을  난 슬쩍 들여다본다. 버스 안 맨 뒷자리엔 아무도 없다. 복잡하게 뒤엉킨 실타래가 머리 위로 툭 하고 떨어진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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