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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쎄쓰 애듈란 Aug 27. 2024

입이 쓴 날들

 어릴 때 나는 언니와 함께 외가에 맡겨졌었다. 그때 나이가 만 3살쯤이었다.


 맞벌이하셨던 부모님과 떨어져 약 3년 정도를 시골에서 지냈는데, 그때부터 나는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고 한다. 나는 종종 유치원에 간 언니가 돌아오면 언니를 붙잡고 울곤 했다. 그런 나를 보며 할머니께서는 "왜 우냐… 할머니가 때리디야?"라고 물으셨고, 나는 "그냥 눈물이 나오잖아"라며 소리 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프셨다고, 할머니는 그 후로도 나를 볼 때마다 말씀하셨다.


 자그마하지만 꼿꼿한 외할머니를 나는 사랑했고, 존경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막내딸을, 그리고 그 딸의 막내딸을 늘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이 나는 싫었다. 할머니가 안심할 수 있는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한 것은 중학생 무렵이었다.


 언니는 공부를 잘하니 대학에 가야 하고,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서 빨리 취직해 돈을 벌어 부모님을 도와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3 담임선생님께서 단호히 실업계는 안 된다며 원서를 써주시지 않아 인문계에 진학했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할머니는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빨리 돈을 벌어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드려야 한다는 생각의 뿌리에는 할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나는 대학을 다니는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고, 3학년 때 취업했다. 종종 할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두둑하게 용돈을 챙겨드렸다. 할머니는 그제야 "느그 엄마 고생도 인제 끝났다."라며 안도하셨다. 그런 할머니를 보는 것이 좋았다.


 그 무렵, 나의 생애 첫 연애가 시작되었다. 짝사랑이나 썸이 아닌, "우리 사귀어요"라고 주위에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이성 친구를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여중, 여고를 나왔다.) 가족 중 나의 애인을 처음 본 사람도 외할머니였는데, 당시 애인은 내가 할머니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언젠가 한 번은 나 없이 외할머니 댁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며 작은 선반을 만들어 드렸다. 전기밥솥이나 물주전자를 올려놓을 수 있는 선반이었다.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스스로 살림을 놓지 않으셨던 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선반이 얼마나 편리한지 말씀하시곤 하셨다. 예의 바르고 말수가 적은 그를 할머니는 "양반"이라 하시며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 할머니께서 그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나 역시 그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더 커졌던 것 같다.


 그와 결혼하던 날에도, 두 아들을 낳았을 때도 할머니는 "너는 잘 살 거이다."라며 내 등을 다독여 주셨다.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아 나는 안심이 되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할머니께 갈 때마다 박하사탕이나 자두맛 캔디, 청포도맛 사탕 같은 것들을 선물로 사다 드렸다. 끝없는 농사일을 하며 하루 종일 바삐 움직이시는 할머니의 주머니엔 항상 사탕 두, 세알이 들어 있었다. 그때는 이유를 알지는 못했지만 할머니는 천천히 녹아 오래오래 달콤함이 유지되는 사탕을 좋아하셨다. 내가 사다 드린 사탕을 귀한 것인 양 받아 할머니의 비밀 벽장에 넣는 모습을 보는 것이 뿌듯했다.


 갱년기 증상이 시작되면서, 할머니가 자주 말씀하시던 "입이 쓰다"는 말이 자꾸 떠올랐다.


 지난가을, 오랜만에 할머니 산소를 찾았다.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자두맛 사탕을 앞에 두고 절을 올리는데, 나도 모르게 펑펑 눈물이 났다. 왜 우느냐고 묻는 남편에게 "그냥 눈물이 나오네."라고 대답했다.


"할머니… 나도 요즘 자꾸 입이 써. 몸도 여기저기 막 아프고… 할머니도 그랬어? 어떻게 견뎠어요?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긴 하는 건가? 나도 남들보다 빠른 거 아는데, 다른 사람들이 내 폐경을 믿지 않는 게, 그래서 내가 이 나이에 폐경이 된 게 더 큰일인 것만 같아 너무 속상하고 슬퍼. 그래서 너무 힘들어.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나오나 봐."


 눈물에 내 마음의 고통과 불안을 담아 흘려보냈다. 그러면서도 문득 깨달았다. 어릴 적 내가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릴 때마다 할머니는 언제나 내 곁에서 묵묵히 나를 다독여 주셨다. 그때의 나는 그저 눈물이 나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할머니는 늘 내 마음을 알아주셨다. 아마 지금도 할머니라면 내 슬픔을 이해해 주실 것이다.


 그날 내 등을 감싸던 햇살이 너무 따뜻해서, 마치 할머니가 "너는 잘 이겨낼 거이다."라며 내 등을 다독여 주시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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