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어원
탈린은 하르유마(Harjumaa)의 주도이자 에스토니아 수도로 발틱의 진주라고 불린다. 시내 중심에 있는 올드타운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중세 도시 중 하나로, 경제와 정치 중심이 되어 관련 역할을 수행한다.
탈린을 중심으로 배로 약 1시간 반 ~ 2시간 거리에는 핀란드의 헬싱키, 버스/기차로 약 7시간 거리에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버스로 약 7시간 거리에 라트비아 리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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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린 도시 역사는 에스토니아의 전체적인 역사와 맞물려있지 않다. 에스토니아는 러시아가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나갈 수 있고(핀란드를 통해서 육로로 가기엔 동사 가능성이 너무 높다)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들어올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12세기 초반부터 침략받기 시작했다. (게다가 본격적인 침략이 있기 시작한 12세기 전부터(기록상으론 기원후 6세기부터) 이미 사레마와 히우마 섬을 포함한 에스토니아 동부지역에 바이킹족이 들어와서 거주 중이었다. 히우마섬에 있는 히우마 성이 바이킹족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 동부는 아직도 스칸디나비아 반도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에스토니아는 덴마크, 독일, 스웨덴, 러시아, 폴란드 말고도 *리보니아(Livonia, 현 라트비아 북부+에스토니아 남부)라는 중세부터 근대까지 존재했던 왕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근대 이전까지의 탈린 역사는 에스토니아 북부역사 일부분과 맞물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전체적인 맥락은 비슷하다.
5천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있는 이 도시가 제대로 된 권리를 부여받은 건 1248년. 13세기 초 덴마크 침략 이전에는 문서로 기록된 역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학자들은 해당 지역에서 발견하는 유품 등으로만 12세기 이전 시대 상황을 추측한다.
1219년 덴마크가 린다니세(Lindanise) 전쟁을 통해 탈린을 포함한 에스토니아 북부 일부를 지배하기 전까지, 에스토니아는 1193년부터 1290까지 리보니아 기사단의 지배를 받았다.
역사학자이자 신부, 선교자인 라트비아 헨리(Henry of Latvia)의 연대기에 따르면 덴마크 왕인 발데마르 2세(Valdemar II)는 북방 십자군(Northern Crusades, Baltic Crusades) 기간 동안 리보니아와 독일-스칸디나비아 반도 식민지화를 위해 에스토니아 북부로 침략했다. 당시 탈린의 이름은 린다니세(Lindanise)였으며 이전부터 중요한 항구도시 중 하나로 무역이 어느 정도 발전되었다고 한다.
발데마르 2세는 1219년 6월 15일 일으킨 린다니세 전쟁에서 간신히 승리하여 에스토니아 북부를 손에 넣었다(이때 덴마크는 스웨덴과 손을 잡고 현재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위치한 일부 지역 -> 핀란드 -> 에스토니아 -> 러시아 ->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 순으로 침략했다.). 그리고 적어도 9세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톰페아 성을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시내 중심은 톰페아 언덕이 아닌 언덕 아래,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커뮤니티가 있던 성 올라프 교회였다.
그렇게 덴마크령 에스토니아가 에스토니아 북부에 설립되지만 국토 대부분은 여전히 리보니안 기사단의 지배를 받았다.
탈린을 포함한 에스토니아 북부는 1227년부터 1238년까지 덴마크에게 임시 권리를 부여받은 *리보니안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the Order of the Brotherhood of the Swords)의 지배를 받았다. 이들은 1230년 고틀란드에 거주 중이던 독일계 상인들을 탈린으로 초대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탈린 시민수를 크게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
수도회가 물러가고 덴마크의 직접적인 지배가 시작되었다. 덴마크 왕이었던 에릭 4세가 1248년 5월 15일 뤼벡법을 재정, 도시로써의 권리를 부여했다. 이후 13세기 말, 탈린은 한자동맹에 가입하게 되고 약 200여 년간 러시아, 특히 노브고로드(Novgorod)와의 무역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1343년 *성 조지의 밤 봉기(Saint George's Night Uprising)가 일어난다. 에스토니아 소작인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봉기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 시기를 기회로 붙잡은 독일 십자군은 덴마크에게 에스토니아 북부를 팔라고 강요했다. 독일은 의회나 도시 운영 쪽으로는 크게 간섭하지 않으며 북부 지배권과 무역에 필요한 창고업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다. 도시 운영은 덴마크가 지배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탈린 의회가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한자동맹 무역으로 최대 흑자를 맞은 사람들은 대부분은 베스트팔(Westfahl)과 라인란트(Rheinland) 출신의 독일인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도시가 부유해지고 물가와 생활비가 올랐는데, 방세가 워낙 비싸지는 바람에 에스토니아인들이 시내 중심에서 쫓겨나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하지만 첨단장비가 없던 시대라 건축을 포함한 대부분의 공사는 사람 손으로 직접 이루어져야만 했는데, 이런 이유로 시내 중심의 독일계 부자동네와 시내 외곽으로 쫓겨난 에스토니아계 동네가 병합이 되면서 두 동네 간 다툼이 심해졌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독일인이 에스토니아인을 노예로 삼았던 문제도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한다. 마을 병합에 대한 기록은 당시 시민 수로 확인할 수 있는데 14세기 중반 탈린 시민은 약 1000여 명이었던 것으로 집계되지만 중세 말엔 약 6,000 ~ 7,000명 정도라고 기록되어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15세기, 한자동맹으로 인구가 늘자 도시 전체를 확장 공사하면서 추가된 부분이다. 당시 도시 재개발 붐이 일며 시청은 1404년, 대 길드 건물(The Great Guild building)은 1410년, 올라비 길드 건물(The Olavi Guild building)은 1422년 재개발되었다. 하지만 1433년 탈린 대화재(The Great Fire)가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건설붐이 같이 일었다. 그렇게 올드타운 성벽 앞, 툼페아 언덕 요새는 16세기에 만들어졌다.
탈린에서 가장 큰 길드 동맹은 대 길드(The Great Guild)로 소속 길드는 블랙헤드 형제길드(Brotherhood of the Blackheads), 카누티 길드(Kanuti Guild), 올라비 길드(Olavi Guild)를 포함한 종교협회 등이 있다.
14세기 중반부터 1940년까지 탈린에서 활동한 블랙헤드 형제길드(Brotherhood of the Blackheads)는 결혼하지 않은 상인, 상점 주인, 리보니아 출신의 외국인 등이 속했다. 그들은 무역뿐만 아니라 도시를 지키는 기병대로도 활동했다. 1526년에는 rock-hurling machines 8대, 대포 20대(20 cannon-carriages), 소구경 대포 66대(66 small-caliber guns)를 탈린 시의회에 선물했다. 나르바 시의회로는 자금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나르바에서 생산되는 모든 총 및 대포는 블랙헤드 형제길드의 문장을 넣게 되었다. 또한 탈린에서 발발한 거의 모든 전쟁에 참전해 도시를 지키는데 크게 한몫했다. 이후 대북방 전쟁(1700~1721)이 끝나고 러시아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자, 무역의 퇴보와 함께 군사형사회/군인협회(military society)로 길드를 바꾸게 된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사회 문화 예술에 많은 후원을 하였고 구소련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강제 해체되어 대부분의 길드원이 독일로 피난 갔다. 그들은 현재 함부르크에 정식 길드로 등록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카누티 길드(Kanuti Guild)는 블랙헤드 형제길드와 함께 19세기까지 탈린에서 활동했던 길드다. 현재는 길드 건물과 정원을 정부에서 임대해 여름 정원으로 꾸몄다. 건물은 극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올라비 길드(Olavi Guild, St. Olav's Guild)는 독일계가 주름잡던 시대에 에스토니아인들이 가입한 길드로 주로 도살업자, 무두장이(짐승의 날가죽에서 털과 기름을 뽑아 가죽을 부드럽게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사토장이(gravedigger)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카누티 길드와 병합된다.
올드타운에 이 세 길드 건물이 아직도 잘 보존되어 남아 있다. Pikk(긴, long) 거리에 있는 스웨덴 대사관 이전 네 개의 건물이 길드 건물이며, 그중 카누티 길드와 올라비 길드 사이에 있는 건물에서 수공예품을 팔고 있다.
물론 이 세 개의 길드 외에도 당시 톰페아 일대에서 Holy Flesh, Gertrud, Hiob, 10 000 Knights, Antonius, Victor, Rochus, Michael, Mary Guild and Anna 등의 형제 길드(Brotherhood)가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1558년부터 1583년까지 러시아 차르국의 이반 4세(Ivan IV Vasilyevich, Ivan the Terrible)가 서유럽과의 교류를 위해 북발트해(the Northern part of the Baltic Sea) 독점권, 그중에서도 탈린을 얻기 위해 리보니안 왕국(Kingdom of Livonia)과 함께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승리는 연합국을 형성한 리보니안 십자군(테라 마리아나, Terra Mariana), 덴마크-노르웨이(연합), 스웨덴 왕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자포리자 카자크(Zaporozhian Cossacks), 트란실바니아 공국(Principality of Transylvani) 이 가져갔다. 리보니안 전쟁이 진행 중이던 1561년이 스웨덴의 에스토니아 북부 지배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덴마크-노르웨이 연합국은 에스토니아 섬 사레마(Saaremaa)의 지배권을 차지했다(이 전쟁은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발트 3국에 대한 강한 지배권을 행사하던 시기(1562-1570)다. 시기명은 Dominium maris baltici). 무역을 포기할 수 없던 러시아가 중간에 두 번, 1570년 ~ 1571년과 1577년 더 침략한 기록이 있다.
전쟁으로 인한 도시내 손실은 크진 않았지만 1602년 ~ 1603년 흑사병으로 한 번 크게 타격을 입고, 1684년 탈린 대화재가 또 일어나면서 톰페아 언덕 대부분의 건물이 전소된다.
스웨덴이 에스토니아 북부지역을 점령하면서 탈린은 무역도시에서 행정도시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들은 탈린 시의회를 없애지 않았고 그에 따른 권리를 부여했지만 무역이 감소하고 부를 잃게 되자 결국 시의회의 독립성을 축소시켰다.
하지만 구스타브 2세, '북방의 사자'가 국왕이었던 스웨덴은 영향력을 넓혀 핀란드, 노르웨이, 에스토니아 남부였던 리보니아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며 에스토니아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짐나시움(Gümnaasium, 중+고등학교)이 대표적인 예로 구소련 시대 최고 짐나시움이라 불렸던 레발 짐나시움 Reval Gymnasium(Reval은 당시 탈린 이름이다. 구소련 시대부터 구스타브 아돌프 짐나시움(Gustav Adolf Gymnasium, 1631년)이라고 불려 오고 있다.)과 타르투 대학(Tartu Ülikool, 1632년)이 있다.
반드시 탈린을 차지해서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할 목적을 갖고 있던 러시아는 1700년, 스웨덴에게서 에스토니아를 뺏어오기 위해 대북방 전쟁(Great Northern War, 1700~1721)을 일으킨다. 러시아는 한창 전쟁 중이던 1710년 탈린을 손에 넣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많은 사람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1708년을 기준으로 이 전에는 약 10,000여 명 정도가 탈린 시민으로 등록되었지만 그중 8천여 명이 사망하거나 피난을 가게 되어 1710년엔 약 2,000여 명만 남아있었을 뿐이라고. 1780년대 다시 10,000여 명으로 늘었다.
표트르 대제는 전쟁 중 탈린에 항구를 지을 것을 명령했다. 1714년부터 1722년, 약 8년간의 공사를 거쳐 옛 도시 항구(the Old City Harbour)가 만들어졌다. 이 항구는 현재 발트권에서 가장 크고, 가장 바쁜 항구로 수입/수출뿐만 아니라 국내, 국외 라인의 페리도 운영 중이다. *터미널 A, B, D가 다 이곳에 몰려있다.
당시 기록된 협약문에 따르면 러시아는 스웨덴처럼 탈린의 권리를 많이 뺏지 않았다. 시의회는 살아남았고 뤼벡법도 영향력을 끼쳤으며 행정 언어였던 독일어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1783년 예카테리나 2세가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에 법을 재정하고 새 정부를 출범한 뒤 러시아 정부가 탈린에 설립되었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시의회는 모든 권리를 잃어버리고 법정으로써만 운영되었고, 6명의 시의회 의원은 러시아 국회에서 뽑혔다.
그렇게 러시아 파워가 더욱더 강해지고 있을 무렵, 어머니(예카테리나 2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러시아 파벨 1세가 1796년 탈린 의회에게 이전 권리를 재부여했다.
19세기 러시아 제국은 탈린 의회 권리를 또다시 줄여나가기 시작한다. 1819년 시의회의 지역 경찰 통제권이 박탈당한다.
1870년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 of Russia)가 법을 새로 재정하고 1877년 3월 26일 발트해 연안에 있는 러시아 소속 도시들은 러시아 법을 따르기 시작했다.
시장이 되기 위해선 중앙 정부(러시아)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고, 탈린 시민만 가능했던 투표는 러시아인도 가능하도록 바뀌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분명하게 나뉘어있던 톰페아(부자동네)와 외곽(lower town) 관련 법을 완전히 폐지했다.
187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탈린까지 연결된 기차 노선, 발틱 레일(Baltic rail road)의 운행을 시작으로 탈린에 설립된 종이, 펄프공장과 관련 산업이 크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1877년 트램 운영이 시작됐으며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군사업이 유행했다.
1910년 현 에스토니아 드라마 연극장인 탈린 독일계 극장(Tallinn German Theatre)이 설립되고 1913년 에스토니아 협회 건물이 만들어졌으며 이곳은 현재 에스토니아 극장으로 운영 중이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 현재 탈린 외곽 도시인 늠메(Nõmme)와 메리밸야(Merivälja)지역의 규모가 점점 커졌다. 이 중 늠메(Nõmme)는 에스토니아내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 중 한 곳이다.
19세기부터 20세기는 에스토니아 민족성이 운동이 크게 일어난 시기다. 교육과 경제가 발전했고 에스토니아 신문사 중 하나인 테아타야(Teataja: Journalist)가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하며 러시아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1904년 선거에서 38명의 에스토니아인, 5명의 러시아인이 뽑히며 1906년 초대 에스토니아 시장인 *볼데마르 렌데르(Voldemar Lender)가 선출되었다.
1918년 1월 31일 구소련군과 탈린 노동자들에 의해 시의회가 한 번 해체되기는 했으나 구소련은 표면적으로만 해체되었다고 믿었다. 1918년 2월 24일 볼셰비키(Bolsheviks)의 세력이 약해지자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독일군이 에스토니아로 들어왔다.
세계 제1차 대전, 독일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하고 지역 정부가 회복되었다. 1919년 6월 16일 Republic of Estonia라는 나라 이름으로 처음 시의회가 세워졌다.
19세기 산업화와 함께 탈린 내 시민수가 점차적으로 늘기 시작하면서 1917년에는 160,000명 되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1939년 약 145,000명으로 줄어들었다.
1918년부터 1940년까지 에스토니아 1차 독립 기간이 끝나고 다시 구소련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정상화되어 운영 중이던 시의회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1년 뒤인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8월 28일에 독일 군대가 탈린 만(bay)을 장악한다. 그렇게 탈린 시의회는 다시 이전의 에스토니아 방식을 되찾게 되었지만 3월 9일과 10일, 구소련이 탈린 폭격을 시작하면서 약 500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5,073개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폭격 당시 하르유(Harju)거리와 성 니콜라스 교회를 제외하고 올드타운 내 큰 피해는 없었다.
1944년 9월 23일 구소련이 탈린을 다시 장악하고 재지배가 시작된다. 1989년 12월 10일 구소련 출신의 시의원장은 탈린 시의회에 그대로 남았고, 구소련 집행 위원회가 도시 정부(City Government)가 되었다.
1991년 8월 20일 두 번째 독립과 함께 에스토니아 공화국이 재설립되었다. 이로써 에스토니아는 두 번의 독립기념일이 생기게 되었는데 2월 24일(1918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과 8월 20일(1991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이다.
2월 24일은 Independence Day, 8월 20일은 Independence Restoration Day. 두 독립기념일이 모두 국경일이다.
대부분 'Tallinn(탈린)'이라는 어원이 '덴마크인의 도시'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정확한 어원은 아무도 모른다. 어원은 의미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1. Taani(덴마크인) + Linn(도시) = 덴마크인의 도시 / 덴마크가 에스토니아를 점령하고 성을 세운 역사가 있기에 거기서 비롯되었다 생각하는 첫 번째 가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참고로 만약 한국의 코리아(C/Korea)처럼 덴마크가 에스토니아를 점령했을 당시 주변국이 '탈린'이라고 불렀기에 이렇게 굳어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물론 덴마크가 톰페아성을 크게 확장했을 때 '덴마크 성'이라고 이름 짓긴 했다. 하지만 덴마크가 탈린 톰페아에 성을 짓기 전, 후 당시 이름은 라파엘(Raphael), 레발(Reval)이었다. 이름은 자주 바뀌었고 '탈린'은 1918년 지정되었다.
2. Tali(겨울) + Linn(도시) = 겨울의 도시 / 많은 에스토니아인이 탈린의 어원은 이거라고 대답했던 두 번째 가설. 눈이 워낙 많이 오는 나라이기에 이쪽이 조금 더 어원 풀이로 정확하다는 의견이 많았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점령당했던 역사를 굳이…. 수도 이름에까지 쓰진 않을 것 같다.
3. Talu(농장, 집) + Linn(도시) = 농장, 집의 도시 / 탈린은 한자동맹의 중요 거점으로 본격 개발/확장된 지역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세 번째 설도 나온다. 하지만 세 번째 가설에 대한 많은 에스토니아인의 대답은 주로 '가능한 이야기이기는 하나, 겨울의 도시가 조금 더 올바른 해석이다'었다.
▶리보니아(Livonia)
지금은 역사에 묻힌 중세부터 근대까지 존재했던 왕국. 리보니안(Livonian: 현재 라트비아 해안가에 거주했던 중세시대 핀란드계 라트비아 북부와 에스토니아 남부 원주민)의 이름을 따서 '리보니아'라고 이름 지어졌다. 13세기 성 조지의 밤 봉기(Saint George's Night Uprising)를 통해 독일 십자군과 함께 지금의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 때 신성 로마 제국 출신 독일인(대부분)과, 덴마크인이 있던 리보니안 십자군(Livonian Crusade)이 만들어진다. 16세기 리보니안 전쟁이 발발하자 지금의 에스토니아 남부와 라트비아 북부로 영토가 다시 줄어들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존재했다. 전쟁 후 지금의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로 나뉘어졌다.
▶리보니안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the Order of the Brotherhood of the Swords)
1202년 리보니아의 제3대 주교 알브레히트 폰 북스회프덴이 창설한 기사 수도회로 1024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정식 인가와 축성을 받았다. 기사단은 독일 출신의 수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1026년 시아울리아이(사울레) 전투에서 완패당한 후 다음 해인 1237년 독일 기사단에 흡수되었다.
▶성 조지의 밤 봉기(Saint George's Night Uprising)
1343년 4월 초부터 약 2년간 일어났던 에스토니아의 중요한 봉기 중 하나. 지금의 에스토니아 북, 동부지역인 하르유마(Harjumaa, 당시:Harrien), 라네마(Läänema, 당시:Wiek), 사레마(Saaremaa, 당시:Ösel)에서 스웨덴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며 일으켰다. 봉기가 일어난 주된 이유는 덴마크의 지배로 인한 에스토니아 농경사회의 위기, 기근, 심한 억압 등이 있다.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리보니아가 세력을 확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구스타브 아돌프 짐나시움(Gustav Adolf Gymnasium)
1631년 스웨덴 국왕인 구스타브 아돌프가 13세기부터 탈린에 있던 수녀회 건물에 세운 중등학교로 1~12학년의 교과과정을 진행한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중등학교 중 하나이며 설립 초기에는 어학(수사학, 시, 그리스어, 라틴어, 고대 히브류어 등)을 주로 다뤘다. 설립 당시에는 중등학교로 중, 고등과정만 진행했지만 현재 초등 과정을 추가했으며, 스웨덴계다 보니 중등과정부터는 스웨덴어를 선택해서 배울 수 있다.
▶탈린 올드 시티 항구(Old City Harbour, Vanasadam)
터미널 A: Eckerö(핀란드회사), Viking(핀란드회사), St. Peterline(핀란드회사로 추정) 라인 탑승동
터미널 B: Eckerö, Viking, St. Peterline 라인 하선동
터미널 D: Tallink(에스토니아회사) 라인 탑승, 하선동
▶볼데마르 렌데르(Voldemar Lender) 1876.03.01 탈린 ~ 1939.09.30 탈린
엔지니어이자 에스토니아 탈린(당시 도시 이름 레발 Reval)의 초대 시장(1906~1913). 건설회사를 소유한 집안 출신이며 탈린 알렉산데르 짐나시움 졸업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탈린으로 돌아와 Dvigatel wagon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다가 1904년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06년부터 1913년까지 탈린 시장과 시청 건축과 업무를 같이 진행했다. 러시아 제국 시대에 에스토니아어를 고취하는 목적으로 만든 에스토니안 국립 교육 협회(Estonian National Education Society, Eesti Rahvahariduse Selts)의 회장이기도 하다. 부인인 엘프리에데 렌데르(Elfriede Lender) 역시 교육자이며 에스토니아 최초의 에스토니아어 여학교 설립자이다.
출처:
1. 위키피디아
2. 에스토니아 관광청 공식 홈페이지 http://www.visitestonia.com/en
3. 탈린 공식 홈페이지: https://www.tallinn.ee/eng/History-of-Tallinn
4. 로컬라이프 공식 홈페이지: https://www.local-life.com/tallinn/articles/history#user_reviews
5. 에스토니아 관광청 역사 홈페이지 http://histrodamus.ee/index.php?event=Show_main_layers&layer_id=171&lang=eng
6. 론리플래닛 에스토니아 역사 페이지: https://www.lonelyplanet.com/estonia/history
7. 월드 히스토리: http://www.worldhistory.biz/middle-ages/19732-st-george-s-night-revolt-1343.html
8. 에스토니아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www.estonica.org/en/Much_ado_about_Estonia_or_who_prevailed_on_St_Georges_night/St_George%E2%80%99s_Night_uprising_and_%E2%80%98help%E2%80%99_from_Sweden/
9. VisitTallinn: https://www.visittallinn.ee/eng/convention/meet-in-tallinn/destination/historical-facts
10. 카누티길드 극장 공식홈페이지: https://www.saal.e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