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타운, 시청광장, 시청, 시청 약국, 톰페아 성
현대 유럽에선 보기 힘든 중세시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인 장소가 많은 올드타운. 시내를 제외하고 올드타운만 봤을 땐 규모가 작기 때문에 건물 내부나 미술관, 박물관 등을 둘러볼 계획이 아니라면 반나절에서 하루로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 탈린 전체를 여행할 예정이라면 적어도 이삼일 정도는 계획하는 게 좋다.
14세기, 탈린에 침략하려는 외지인을 막기 위해 덴마크인이 만든 톰페아 요새와 성은 지금도 올드타운에 그 모습이 잘 보존되어 남아있다.
성벽에는 총 8개의 게이트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중세시대로의 첫 관문'은 바로 비루(Viru) 거리에 있는 '비루 게이트'다. 다른 성문들은 전쟁 때 전소되어 사라지거나, 1880년대에 에스토니아 정부가 대중교통을 이용한 올드타운 접근성을 높이려고 일부러 무너뜨리기도 했다.
비루 게이트가 살아남은 이유는 그 많은 전쟁을 겪으면서도 타격이 크지 않았고, 근처에 시장에 있어 이동인구가 많으며, 광장으로 가장 빠르게 접근할 수 있어 에스토니아 정부에서 도시 계획 당시, 비루 게이트를 올드 타운의 관문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비루 Viru는 문/경첩/연결고리라는 뜻이다. 에스토니아인 입장에선 외국인을 위해 뒤에 덧붙인 게이트(Gate/문)라는 단어 때문에 Viru gate가 '문문'이 된다.
라에코야 플라츠는 말 그대로 '시청광장(raekoda 시청, plats 광장)'이라는 뜻으로 12세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장터라고 전해지며 올드타운 중심에 위치한다.
비루 게이트에서 쭉 직진해 올라가면 광장으로 들어가는 길목 왼쪽에 교회같이 생긴 건물이 있는데 그게 바로 시청이다. 정말 평범해 보이는 건물인 데다 외관에 시청이라고 큼지막하게 적어놓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눈에 띄는 경비원이나 경찰이 경계 근무하는 것도 아니고, 근처에는 레스토랑이 많아서 시청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 게다가 관광객도 너무 많다.
그런 건물이 발트 3국과 스칸디나비아반도(보통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상황에 따라 핀란드,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올란드 제도 포함)에서 가장 오래된 시청 건물이라니.
탈린 시청(Tallinna Raekoda)은 13세기. 지금의 시청광장이 장터일 때, 당시 시장에 있는 한 시민 공간의 확장공사로 시작해 1404년 완공된 고딕 스타일의 건축물이다. 시청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건 1372년부터로 이전에는 극장이나 새 상품을 소개하는 시장, 무역장이었다. 1530년 이전에는 종탑이 없는 상태였고 지하를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이 1322년 부동산 책에 기록되어 있다. 지하와 1층(유럽에선 Ground floor)에 지금도 남아있는 7개 창문은 13세기 시민 공간일 때부터 존재하던 창문이다.
건물은 종탑(지면에서 종탑까지) 높이 64미터, 건물 높이 36.8미터, 서쪽 넓이 14.5미터, 동쪽 넓이 15.2미터로 넓은 지하 공간을 포함한 지상 높이 2층이다. 그중 종탑은 시청 건물의 트레이드마크로 탈린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1997년, 시청건물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그 의미를 기리고 전통을 유지하고자 현재도 시청 내부 일부를 박물관, 콘서트홀, 극장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약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가장 큰 홀인 '시민의 홀'에서는 보통 음악 공연을 진행한다.
초기엔 회색 석회암으로 지어졌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많은 보수공사를 거쳤다. 1346년 덴마크가 에스토니아를 지배하고 탈린이 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한자동맹의 중심 무역도시로 성장해가자 창고를 확장했다. 그렇게 건물 전체 길이는 1370년대, 지붕은 1374년에 완공되었다. 기록상 1371년부터 74년까지 서쪽으로 확장공사가 이뤄졌다고는 하나 지금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공사들로 인해 결과적으로 건물 전체 모양이 사다리꼴로 약간 휘게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 외관은 당시 무역(한자동맹) 흑자로 충분한 자금을 댈 수 있었던 정부가 1402년부터 04년까지 진행했던 부활절 기념 확장 공사의 결과물이다. 총 공사 기간은 2년 반 정도이며 여름에만 진행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채석장이었던 라스나마에(Lasnamäe)에서 건물의 주재료인 돌을 가져왔다. 또한 소금과 천, 청어, 금속, 와인, 석회암, 목재, 아마(flax) 등이 가져온 흑자는 시청 건물 확장 공사뿐만이 아니라 툼페아에 만들어진 요새, 성벽, 대성당 건축에도 크게 한몫 보탰을 정도로 이윤이 어마어마했다고 전해진다.
1530년 시작된 종탑 공사는 중간에 한 번 완공되었지만 1627년부터 28년까지 G. Graff가 진행한 프로젝트로 새롭게 디자인되었다. 첨탑 공사 역시 종탑 공사와 함께 진행했지만 1781년 재디자인되었다. 게다가 1944년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인해 전소되는 바람에 1952년 종탑을 다시 만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1781년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다 썼기에 옛 모습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8각형의 종탑은 르네상스 후기 디자인이지만, 1652년 종탑을 제외한 건물 외관을 바로크양식으로 바꾸면서 현재 한 건물, 두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종탑 공사의 시작과 함께 탑의 맨 꼭대기에서 풍향계 역할을 하며 에스토니아를 지켜오고 있는 올드 토마스(Old Thomas). 실존 인물로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다. 전설에 따르면 탈린에 거주하던 발트 독일인이 매년 봄에 주최한 *파(포)핀제이(Popinjay, Papingo, pole archery) 경기에 출전한 인물로 실력이 아주 탁월했다고는 하나, 사회계급이 낮은 집안 출신이라 신분제도에 가로막혀 수상할 수 없는 비운의 인물이었다. 소년이었던 어린 토마스는 아무도 맞추지 못한 장대 끝에 매달린 새 조각을 유일하게 맞췄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에게 수상 대신 탈린을 지키는 경비원으로 평생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토마스는 그 기회를 받아들이고 도시 경비원으로, 시청광장에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일생을 보냈다.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별칭이 Vana Toomas(Old Thomas/토마스 할아버지, Vana는 영어로 직역하면 old. 한국어나 영어로는 꽤나 직설적이지만 에스토니아에서는 아니다. 할머니: Vanaema, 할아버지: Vanaisa) '토마스 할아버지' 인걸로 보아 장수하지 않았을까 한다. 토마스 사후에 아이들은 시청광장에서 그를 찾았고 부모들은 사망 사실을 알리기 꺼려했다. 그래서 종탑에 그의 모습을 딴 풍향계가 만들어지자 토마스 할아버지가 저 위에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며 착한 어린이들의 베개 밑에 사탕을 놓고 간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기 시작했고 곧 전설이 되었다.
1944년 종탑이 전소되면서 올드 토마스 풍향계 역시 타격을 입게 되어 1952년 새로운 올드 토마스 풍향계가 종탑 끝에 세워졌다. 1520년 만들어진 첫 번째 동상은 1952년부터 시청 내부에 있는 탈린 도시 박물관에서 보관, 전시 중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 중 하나인 라에압텍. 이 시청 약국은 15세기부터 지금까지 쭉 약국으로써 역사를 이어오고 있으며 탈린에서 가장 오래된 의료 사업체다. 약국의 첫 개원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1422년 이미 세 번째 주인이 약국을 운영 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연도를 기준으로 1415년 약국이 처음으로 설립되었다고 생각한다.
시의회 기록물에 따르면 Nuclawes라는 이름의 약사가 다른 10명과 함께 개원한 것으로 나와 있으며 대부분은 시의회 의원이었다. 하지만 1422년 이후 기록된 문서에는 첫 번째 약사는 Johann Molner이며 15세기 중반부터 이미 약을 팔고 있었다고.
누가, 언제부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582년부터 1911년까지 Burchart(Burchard) 가문이 대를 이어온 기록은 명확히 남아 있다. The Burchart 가는 헝가리 출신 귀족 가문으로 13세기 헝가리 왕족의 남작이며 부호였다.
1579년에서 81년 사이, Burchart 가문 중 한 명인 *Johan Burchart Both Belavery de Sykava가 *St. Paul 전쟁(Battle of St. Paul 1575년 7월 9일)이 시작되자 현재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당시에는 헝가리 도시:Pressburg)에서 잘츠부르크, 뮌헨, 옐가바(라트비아)를 거쳐 난민의 자격으로 에스토니아에 도착했다. 이후 시의회로부터 이전 가게를 인수한다.
기록으로 남은 첫 번째 약사인 Johann Molner와 이름이 똑같아서인지, 아니면 당시 귀족 가문의 전통을 따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헝가리 Burchart가의 요한은 첫아들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이었던 '요한(Johann)'으로 짓고 약국을 잇는 전통을 만들었다. 이 전통은 19세기, 열 번째 장남 요한 10세(Johann X Burchart)까지 이어진다. 1582년부터 1911년까지 총 325년이다. 그들은 의사도 배출해낼 정도로 후대에게 좋은 교육을 했고 이 결과 탈린에서 의학 관련 인문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688년 요한 4세는 약국을 본인 가문의 소유로 바꾸기 위해 600 *탈러(thalers)를 시의회에 지급했다. 그리고 문서로 작성된 약국의 권리와 의무(계약서)를 스웨덴 왕 칼 11세(Charles XI)에게 부여받았다.
1710년 대북방 전쟁(1700-1721)으로 인해 발트해 연안국과 동유럽 내 많은 나라가 흑사병에 시달리며 탈린이 스웨덴에서 러시아로 넘어가자, 요한 5세는 러시아 군에 처음으로 의료기술을 제공한 약사가 되었다. 그리고 1716년, 러시아 해군과 수비대의 정식 의사가 된다.
이 가문이 가장 유명해졌을 때는 1725년으로, 러시아의 대제인 표트르 1세의 임종에 참관의사로 선택된게 계기다. 하지만 표트르 1세는 요한 5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기 전 사망하고 만다.
1802년 요한 8세가 개인 박물관을 설립하고 "Mon faible"이라는 이름을 붙인 후 첫 전시회를 열였다. 현재 요한 8세의 컬렉션 일부는 에스토니아 역사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아쉽게도 요한 9세와 요한 10세가 건강상의 이유로 약국을 운영하지 못하게 되자 결국 마지막 남자 계승자였던 요한 10세의 죽음으로 Burchart 가문의 약국역사가 막을 내린다. 요한 10세의 두 여자 형제는 1911년 C.R. Lehbert에게 약국을 팔았다. 하지만 구소련은 에스토니아 2차 지배기간(1944년 ~ 91년)에 약국을 국영화하고 그냥 방치해버렸다. Lehbert는 권리를 잃어버려 손을 쓸 수 없었다.
독립 이후 2003년부터 2013년까지, 약 50년간 방치되었던 건물을 수리하기 위해 재건축 공사가 이루어졌다.
현재는 1층만 약국으로 운영 중이며, 약국 일부를 아주 작은 박물관으로 꾸몄다. 전시품 대부분은 약 제조기이며, 1635년 Burchart 가의 문장이 찍힌 큰 돌이 있다. 2층은 Balthasar(발타자르)라는 이름의 마늘 레스토랑으로 새롭게 단장해서 문을 열었다.
톰페아 언덕은 에스토니아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칼레브(Kalev)의 아내가 그를 위해 만든 약 7헥타르 규모의 봉분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지역으로, 주성분은 석회암이며 주변보다 20~30미터 정도 더 높다. 톰페아 성은 이 언덕 남서쪽에 있으며 현재 에스토니아 의회(Riigikogu)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9세기 이전부터, 혹은 10세기나 11세기 초. 에스토니아인들이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옛 성(요새)에 1219년 발데마르 2세(Valdemar II)가 이끄는 덴마크 십자군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탈린 정복의 의미를 두기 위해 성 이름을 '덴마크인의 성(Castrum Danorum(Taanilinnus))'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1227년 리보니안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 소속이 되어 재건축이 진행됐다. 이를 시작으로 에스토니아가 침략당할 때마다, 특히 탈린이 침략국의 손에 넘어갈 때마다 거의 매번 그들의 기호에 맞게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목재 요새에서 석조 성으로 재건축이 되었다고 파악되며, 성의 규모가 지금의 크기로 확장되었다.
이후 덴마크는 리보니안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에게서 성을 되찾아 왔지만, 1343년 성 조지의 밤 봉기에서 권력을 잃어버려 1346년 튜턴 기사단에게 팔았다. 그들은 성을 요새보다는 종교 건축(예배당, 기사단 기숙사, 사제단 회의장(Chapter house))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현재 톰페아 성과 탈린의 상징이 된 톨 헤르만 탑(Tall Hermann Tower)을 포함한 Pilsticker(arrow-sharpner), Stür den Kerl(ward off the enemy), Landskrone(crown of the land)을 만들었다.
이 중 46미터로 가장 높은 톨 헤르만 탑의 꼭대기에는 에스토니아 국기가 꽂혀있다. 이 기는 매일 아침 일출, 일몰 시간에 맞춰 에스토니아 국가와 함께 게양, 하기 된다.
15세기 리보니안 전쟁이 발발하고 스웨덴 왕국 소유가 된다. 스웨덴은 정치력을 행사하는 중앙 행정기관으로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렇게 사용되어오고 있다.
러시아는 스웨덴으로부터 1710년 성에 대한 주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1767년부터 1773년까지 위 사진에 보이는 후기 바로크 양식, 지금의 톰페아 성 입구 공사를 진행했다. 아무래도 언덕 아래서 올려다보는 외관이 중세시대 모습이라 입구 역시 그럴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전혀 아니다.
▶파(포)핀제이(Popinjay, Papingo, Pole archery) 장대 양궁(?):
덴마크, 스코틀랜드, 벨기에, 영국, 독일 등에서 15세기부터 유명해진 양궁의 한 종류로 장대 끝에 색칠한 나무 조각 새를 매달아 맞추는 경기.
▶St. Paul 전쟁 Battle of Kerelőszentpál 1575년 7월 8일 발발:
헝가리 대국의 유명한 바토리 가문 출신의 스테판 바토리(Stepehn Báthory 1533년 9월 27일 ~ 1586년 12월 12일)가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 왕좌에 앉기 위해 일으킨 전쟁. 스테판 바토리는 '피의 백작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쇄살인마 중 한 명이자 흡혈귀의 모델인 바토리 에르제베트(Báthory Erzsébet)의 삼촌이다.
▶요한 부르차르트 1세 Johan Burchart Both Belavery de Sykava 1546 ~ 1616:
헝가리어로는 Szikavai és Bélaváry Both János. 발트 독일계 약사. 탈린 시청 약국을 소유했던 Burchart 가문의 1세로 헝가리 대국 Pozsony에서 태어났다. 조상은 헝가리 대국의 남작이며 크로아티아 지방 행정 장관이다. 1575년 St. Paul 전쟁이 발발하자 헝가리를 떠나고 잘츠부르크(1575-1578), 뮌헨(1578-1580), 옐가바를 지나 탈린에 정착한다. 그리고 1583년 4월 30일 시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은 약사가 되었다. 난민신분이었지만 탈린 근처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인 Haabneeme와 Vanamõisa의 귀족이다.
▶탈러 Thalers:
유럽에서 약 400여 년간 통용된 은화. 현재 체코, 당시 보헤미안 왕국의 은광이 있던 Joachimsthal 지역이 원산지이며 Joachimsthal(독어:요아킴스탈:성 요아킴의 골짜기, 체코와 독일 국경에 위치한 스파로 유명한 도시, 체코지역이지만 독일어 사용자들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1945년 독일어를 사용하던 독일계는 쫓겨나고 체코인들을 이주시켰다)의 독일어 축약형이 Thaler이다. 이후 Daalder로 표기가 바뀌고 이는 곧 Dollar의 어원이 된다. 1518년 첫 채광을 시작했고 초기 은화에는 체코 사자와 보헤미안 왕실 문장을 찍어 만들었다.
출처:
1. 위키피디아
2. 에스토니아 관광청 공식 홈페이지: https://www.visitestonia.com/en/toompea-castle
3. Visit Tallinn: https://www.visittallinn.ee/eng/visitor/see-do/sightseeing/pid-108738/toompea-castle
4. 탈린 공식 홈페이지: http://www.tallinn.ee/eng/History-of-Tallinn
5. 에스토니아 국회 공식 홈페이지: https://www.riigikogu.ee/en/visit-us/toompea-castle/
6. 디스커버 에스토니아: http://discover-estonia.com/toompea-castle-in-tallinn-estonia/
*톰페아 성 관련(헷갈림 방지 차원):
톰페아 성 역사를 다룬 대부분 영문 페이지에서 '리보니안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Livonian Brothers of the Sward, The Order of the Brethern of the Sword)를 '독일 검의 기사단'( The German Knights of the Sword)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독일 검의 기사단은 리보니안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의 수도승을 의미한다고 추측합니다(관련 내용을 못 찾음). 아마 리보니안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 소속 중 누가 지배했는지 정확하게 명시하기 위해 그렇게 표기한 것 같습니다만, 이전 탈린 1편에 작성했듯이 탈린은 1227년부터 1238년까지 리보니안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굳이 다르게 표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리보니안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라고 표기했습니다.
기사단의 시작(어떻게 보면 에스토니아 기록 역사의 시발점)::
12세기 초 발트해 주변 대부분 지역은 로만 가톨릭 교회의 지배를 받았다. 이 중 리보니아는 덴마크와 독일, 일부 한자 리그와 시토회(Cistercian Order)의 경제, 정치 지역이었다. 이들은 1160년 지금의 리가에 한자동맹 용 교역소를 만들었다. 이후 리보니아 출신 Albert of Riga(Albrecht von Buxthoeven)가 1201년 리가를 설립하였다. 1년 후 기사단(기사수도회, Military order)의 필요성을 느꼈던 알베르트는 1202년 독일 출신 "전사 수도승(warrior monks)"을 주축으로 한 리보니안 그리스도 기사회를 만들었다. 2년 후 교황 인노첸시오 3세(Pope Innocent III)가 기사단을 정식 허가했다. 기사단의 정식 활동이 시작되었다.
비슷한 이름의 기사단, 활동 기간, 활동 지역, 종교::
리보니안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Livonian Brothers of the Sward): 1204 ~ 1237. 지금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대부분 지역인 테라 마리아나(Terra Mariana: 당시 이름)에서 활동. 로만 가톨릭
리보니안 수도회 (Livonian Order): 1237 ~ 1561. 튜턴 기사단의 분파 중 하나. 지금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대부분, 그리고 독일 일부 지역에서 활동. 로만 가톨릭.
리보니안 십자군(Livonian Crusade): 13세기.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서 활동. 리보니안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 리보니안 수도회, 덴마크, 스웨덴과 적대관계에 있던 십자군. 주축은 신성 로마 제국 출신 독일인이며 일부 덴마크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