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린 Tallinn 3 편

알렉산더 넵스키 대성당, 성 니콜라스 교회, 네이치토르니 박물관,자유광장

by 류현

알렉산데르 네브스키 대성당

Aleksander Nevski Katedraal

알렉산데르 네브스키 대성당 ⓒryuhyeon

알렉산데르 네브스키(알렉산더 넵스키) 대성당은 탈린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디자인의 대성당으로, 1885년 4월 4일부터 1894년 10월 12일까지 에스토니아 총독을 지냈던 러시아인 세르게이 샤크호브스키(Sergey Shakhovsky, Sergei Vladimirovich Shakhovskoy)의 지시하에 1894년 공사가 시작되어 1900년 완공되었다.


당시 탈린 의회 소속 러시아 정치인들은 러시아 시장(Russian market)이나 탈린 레알콜(Tallinna ReaalKool, Gümnaasium, 학교) 근처에 작은 교회를 짓길 원했지만 세르게이 샤크호브스키는 "탈린에 건설될 러시아계 대표 성당은 정교회 승리를 나타내기 위해 발트해보다 더 높아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올드타운 내 톰페아 언덕, 에스토니아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칼레브(Kalev)의 여러 무덤 중 한 곳에 가장 크게 지어졌다.


알렉산데르 네브스키 대성당 ⓒryuhyeon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성 알렉산더 넵스키(Saint Alexander Nevsky)에게 헌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보니 성당의 위치와 의미가 에스토니아 입장에선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1924년, 러시아로부터 1차 독립 당시 이 대성당을 철거하는 스케줄을 잡기도 했었다. 하지만 규모가 너무 크고 그에 따른 자금이 여의치 않아 철거는 이뤄지지 않았다(동시대 같은 이유로 폴란드 바르샤바에 설립된 알렉산데르 네브스키 대성당은 폴란드 독립 후 철거되었다.). 대신 1991년 러시아로부터 두 번째 독립 후 재공사를 진행했다.


1936년 12월 6일. 에스토니아 1차 독립 기간 중 러시아 신자들은 이 대성당이 더 이상 러시아 정교회가 아니라는 제명 선언을 했다. 그렇게 성당은 에스토니아 시몬 성당(The Estonian Simeon church) 소속이 되었고, 러시아 정교회에서 에스토니아 탈린 소속인 사도 교회(The Estonian Apostolic-Orthodox)로 바뀌었다.


성당 탑에는 탈린에서 가장 큰 종(약 15~16톤)을 포함해 총 11개의 종이 있으며 명종곡(여러 종소리로 연주하는 곡)을 들을 수 있다. 재단은 3개로 북쪽은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the Great)에게, 남쪽은 *성 세르기우스 라도네츠(Sergius of Radonezh)에게 헌정되었다.


건물은 핀란드 화강암으로 지어졌으며 5개의 돔이 있다. 각 돔 지붕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와 성당 내부 목재로 만든 성화 벽에 금을 입혔다. 성화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과 아연판으로 제작되었고 창문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었다.

알렉산데르 네브스키 대성당 ⓒryuhyeon
알렉산데르 네브스키 대성당 정문 파사드 ⓒryuhyeon




성 니콜라스 교회&박물관 Niguliste kirik ja muuseum

성 니콜라스 교회&박물관 ⓒryuhyeon

탈린에는 성 니콜라스 교회가 두개 있다. 성 니콜라스 교회(Niguliste kirik)와 성 니콜라스 정교회(Saint Nicholas' Orthodox Church). 두 번째 교회는 러시아계 정교회이며 이 역시 올드타운에 있다.


성 니콜라스 교회(Niguliste kirik, St. Nicholas' Church)는 중세시대 탈린에 지어진 교회로 성 니콜라스에게 헌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성 니콜라스는 어부, 항해사, 아이들 등을 수호하는 수호신이다.


제2차 세계 대전, 구소련이 탈린을 공격하면서 크게 함몰되었지만 다시 재건축되어 지금은 교회이자 박물관, 에스토니아 아트 뮤지움의 분점이다. 그리고 각종 콘서트가 열리는 콘서트홀로도 사용되어 볼거리가 많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략 1230년부터 1275년 사이, 독일 베스트팔렌(Westphalian)계 고틀랜드(Gotland) 출신 무역상인들 의해 완공되었다. 13세기에는 주로 난민을 숨기는 장소와 도시를 보호하는 역할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후 14세기, 탈린이 요새화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도시 방어 역할은 줄어들었고 중세시대 교구를 담당하는 교회로 원래 목적을 되찾았다.


1405년부터 20년까지 진행된 공사로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교회 외관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클리어스토리(Clerestory: 고딕식 교회의 높은 창이 일렬로 달린 부분, 바실리카 건축 디자인 중 하나)가 이때 만들어졌다. 1515년 탑 높이 확장 공사를 통해 후기 고딕 스타일의 첨탑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17세기 탑 보수공사가 이뤄졌고 이후 조금씩 높이를 높여 현재 105미터가 되었다.


이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1523년(혹은 1524년)에 일어난 종교개혁 때 신도들의 수장이 주철(molten)을 자물쇠에 부어버려 사람들의 출입을 막음으로써, 탈린에서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성화가 중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성 니콜라스 교회&박물관 종탑 ⓒryuhyeon

가장 눈에 띄는 중세 작품으로는 분명히 우리 모두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법한 '죽음의 무도'가 있다. 이 작품은 독일 뤼벡 출신의 예술가 베른트 녹케(Bernt Notke)가 15세기 말, 중세시대 예술의 모티브로 유명했던 '죽음의 무도'를 30미터 길이의 나무 판에 그려낸 것이다. 물론 후기 고딕과 북유럽 초기 르네상스 스타일의 예술 작품들도 남아있다. 대부분 독일계 예술가로 Hermen Rode, Jan Borman, Adrian Isenbrandt, Henning von der Heide 등이다.


게다가 이 교회는 특이하게 미라를 전시했다. 바로 찰스 유진 데 클로이(Charles Eugène de Croÿ). 찰스 유진 데 클로이는 헝가리계 조상을 둔 프랑스 크후이-셍-삐에흐(Crouy-Saint-Pierre)출신으로, 중세 유럽 귀족 가문이자 1468년부터 제국의회에 참여했던 클로이(Croÿ)가의 공작이며 육군 원수다. 1651년 태어나 1702년 사망하기까지 룬드전쟁(1676년, 스웨덴 룬드에서 발발한 전쟁으로 스웨덴왕국이 덴마크-노르웨이연합 네덜란드 공화국에 맞서 싸워 이긴 전쟁) 등 많은 전쟁에 참여했는데, 1700년 11월 20일 에스토니아 나르바 전쟁에서 스웨덴군에 포로로 붙잡힌다. 그리고 2년 뒤 탈린(당시 이름: 레발, Reval)에서 사망했다. 사망 후 장례식을 치러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공기와 습도가 미라 보존에 아주 적합한 성 니콜라스 교회에 시체가 맡겨졌다. 그는 1897년 땅에 묻히기 전까지 계속 미라인 채로 전시되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구소련의 탈린 폭격으로 인해 성 안토니 예배당(St. Anthony chapel)을 제외한 내부 인테리어가 대부분 함몰되었으며 종탑에서는 한 달 내내 연기가 나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폭격 이전 몇 세기를 거쳐 꾸준하게 이뤄진 보수공사 덕분에 중요한 문화재는 손실되지 않았다. 폭격으로 인한 재공사는 1953년에 시작해 1981년 끝났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인 1982년 화재가 발생해 종탑과 성 안소니 예배당 지붕이 전소되었다. 1984년 에스토니아 미술사 학자인 *빌렘 람(Villem Raam)의 감독하에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이때 교회 내부에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네이치토르니 박물관&커피샵

Neitsitorni muuseumkohvik

네이치토르니 박물관 겸 커피샵 ⓒryuhyeon

성 니콜라스 교회 앞에 위치한 네이치토르니 박물관 겸 커피숍. 14세기 완공된 성벽과 성탑을 박물관과 커피숍, 레스토랑으로 개조한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중세시대 이 성탑이 만들어졌을 무렵, 도시 치안판사는 악마로부터 도시를 지키고 성을 더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선 어린 소녀의 순결과 젊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붙잡힌 소녀, 이름은 그레타(Greta). 성탑의 지하에 갇혀 홀로 배고픔과 두려움에 싸우다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당시 시대를 생각해봤을 때 그다지 놀라운 결정은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그레타를 기리고자 네이치토르니(Neitsitorni)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네이치토르니(Neitsitorni)는 처녀 탑, 아가씨 탑이라는 뜻으로 독일어(Mägdethurm, Mädchenthurm)가 어원이며 1373년에 처음 기록된 걸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추측된다.


1577년 리보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폭격을 입고 재건축이 진행되었다. 1626년까진 감옥으로 사용되다가, 1842년부터 1960년까지는 실제 주민이 거주하는 주택으로 사용되었다. 중간에 많은 전쟁을 겪어 성탑 내, 외부가 꾸준히 재건축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예술가들이 거주하며 작업을 진행했고 1980년 카페를 오픈했다.


실제 이곳에 거주하고 작업했던 예술가는 *라우드 형제(Kristjan, Paul Raud)*칼 부르만 노렘(Karl Burman noorem) 등 이 있다.


네이치토르니 박물관 겸 커피샵 ⓒryuhyeon




자유 광장 Vabaduse väljak

자유광장 ⓒryuhyeon

탈린에 있는 가장 큰 규모의 공공장소인 자유광장은 만남의 광장이자 각종 콘서트, 퍼레이드, 축제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16세기 이전 부터 존재했다. 현재 비루에만 남아 있는 성문이 16세기 이곳, 광장 입구에도 있었으며 올드타운을 방어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방어 체계를 손보기 시작하면서 약 230년간 황무지로 남아있었다.


1767년에는 에스토니아어로 새로운 광장이라는 뜻의 러시아 이름 Новая площадь으로 불렸고 1910년. 5미터나 되는 표트르 대제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1922년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했고 정부는 그 기념비를 녹여 재활용했으며 1939년 '자유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약 10년 뒤인 1948년. 구소련이 다시 에스토니아를 지배하기 시작하며 승리의 광장(Victory Square)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1989년 5월 '자유광장'이라는 이름을 다시 되찾게 되었다.


자유광장에 있는 독립전쟁 승리 기념비 ⓒryuhyeon

2009년 6월 23일 승리의 날(Victory Day). 광장에 독립전쟁 승리 기념비(War of Independence Victory Column)가 세워지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기념비는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진행된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에 참전한 군인과, 안타까운 사고로 전쟁 당시 목숨을 잃은 민간인을 기리기 위해 높이 23.5미터, 143개의 유리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약 4천여 명이 사망하고 14,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1919년 전쟁의 포화 속에서 그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과 구소련의 지배로 진행하지 못했다. 에스토니아의 두 번째 독립과 함께 1991년부터 다시 언급되기 시작했다. 2005년 봄, 에스토니아 의회는 자유광장에 승리 기념비를 세우는 것에 동의하고 2006년 디자인 대회를 열었다. 약 40여 명이 넘는 참가자들 중 "리베르타스(Libertas, 로마 자유의 여신)"라는 제목으로 참가한 라이네르 스테른펠드(Rainer Sternfeld), 안드리 라이드레(Andri Laidre), 카드리 키호(Kadri Kiho), 안토 사비(Anto Savi)의 공동작품이 수상했다. Celander Ehitus OÜ(2011년 부도난 건설회사)가 기념비를 제조할 회사로 뽑혔다.


톰페아 언덕에서 자유광장으로 내려가는 길 ⓒryuhyeon

▶성 알렉산데르 네브스키(Saint Alexander Nevsky) 1221년 5월 13일 출생 ~ 1263년 11월 14일 사망

일반적으로는 중세 러시아의 '성 알렉산더'로 알려져 있으며 1547년 모스크바의 성 마카리우스(Saint Macarius)가 알렉산데르 네브스키를 성인으로 공표했다. 러시아 노브고로드(Novgorod, 현재 러시아 북부지역)의 왕자이자 키예프(Kiev)와 블라디미르(Vladimir)의 태공이었다. 황금 군단 시절(Golden Horde, 13세기 유럽에 원정한 몽골 군단) 독일과 스웨덴 군을 크게 무찌른 것으로 유명하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넵스키대로도 이 성자의 이름에서 따왔다.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the Great) 958년 ~ 1015년 7월 15일

알렉산데르 네브스키처럼 키예프 대공국의 대공으로 러시아 노브고로드의 왕자였다. 989년 그리스 정교를 키예프 대공국의 국교로 정했다. 이를 계기로 비잔틴 문화가 러시아에 유입되었고 봉건제 사회가 시작되었다.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에서는 성인으로 받들여져 있다.


▶성 세르기우스 라도네츠(Sergius of Radonezh) ~ 1392년 9월 25일 사망

중세 러시아의 수도승이자 정신적인 스승으로 유명하다. 성 세라핌(Seraphim)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에서 가장 공경받는 성인이다.


빌렘 람(Villem Raam) 1910년 5월 30일 출생 ~ 1996년 5월 21일 사망

에스토니아 미술사 학자, 예술품 관리 복원가, 미술 평론가로 패르누에서 태어나 타르투 대학에서 수학했다. 에스토니아 미술사와 문화재의 이해를 돕고 문서화하는데 거의 평생을 쏟았다. 1938년 중세 에스토니아 건축물에 대한 첫 연구를 시작으로 1940년 아트 뮤지움의 감독이 되지만, 1941년 6월 구소련군에 붙잡히면서 시베리아로 강제 유배되었다. 1956년 에스토니아로 돌아왔고 연구를 계속 진행했으며 1957년 에스토니아 구소련 예술가 협회의 이사장이 된다. 1996년 에스토니아 국립(공로) 훈장(the Order of the National Coat of Arms) 3등급을 받는다. 2010년 6월부터 2011년 5월, 빌렘 람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고자 에스토니아 아트 뮤지움에서 그의 건축 사진 전시회를 열었다.


크리스트얀 라우드(Kristjan Raud) 1865년 10월 22일 출생 ~ 1943년 5월 19일 탈린 사망

화가, 일러스트레이터로 에스토니아 국립 박물관의 설립자 중 한 명이다. 쌍둥이 형제인 폴과 에스토니아를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명이다. 빈니(Vinni) 교구 키리쿠큘라(Kirikuküla)출신으로 주로 에스토니아 전통을 다루는 원시주의다. 독일어로 교육하던 라크베레 학교에서 수학하다 타트루 대학으로 옮겨 몇 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1892년 커리어가 맘에 들지 않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났고 그곳에서 만난 요한 퀼러(Johann Köler, 에스토니아인. Estonian national awakening의 리더이자 화가)의 눈에 띄게 된다. 요한 퀼러의 조언을 듣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임페리얼 예술 학교(Imperial Academy of Arts)에서 수학한다. 이후 독일로 넘어가 그림체를 다듬었으며 뒤셀도르프에서 Peter Janssen(피터 얀센, 독일 역사화가)을 만난다. 그리고 뮌헨으로 넘어가 개인교습을 받다가 타르투로 돌아간다. 에스토니아 민족학의 제왕이라 불리는 야콥 허르트(Jakob Hurt 1839~1907)의 죽음으로 민족 각성운동에 눈을 뜨게 되어 국립 박물관을 설립하게 된다. 주로 에스토니아 건국신화와 관련된 그림과 일러스트를 그렸으며 1938년 에스토니아 적십자 훈장(Order of the Estonian Red Cross)을 받는다. 생전인 1940년. 구소련 지배 이전, 에스토니아 정부는 크리스트얀 라우드의 해를 공표하며 큰 규모의 전시회를 열었고, 사후 인 1969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후 4년 뒤, 크리스트얀 라우드 예술대상(Kristjan Raua nimeline kunstipreemia)이 에스토니아 예술가 협회의 주체로 탈린에서 개최되었다. 1992년부터 2011년까지, 유로가 상용화되기 전 에스토니아 통화인 크룬(Kroon)의 1 크룬(0.06유로)에 초상화가 들어갔다.


▶파울 라우드(Paul Raud) 1865년 10월 22일 출생 ~ 1930년 11월 22일 탈린 사망

크리스트얀 라우드의 쌍둥이 형제로 1886년 뒤셀도르프에서 수학했다. 초기 화풍은 뒤셀도르프에서 만난 에두아르드 본 겝하르트(Eduard von Gebhardt, 발트 독일계, 에스토니아 태생)의 영향을 받았다. 쌍둥이 형제인 크리스트얀과 팔디스키(Paldiski)출신의 조각가이자 화가인 아만두스 아담손(Amandus Adamson)과 함께 무후(Muhu)섬과 파크리(Pakri)섬으로 1896년 여행하기 전까지는 주로 초상화 작업을 진행했다. 1899년 다시 독일로 건너갔고 이때 인상주의로 화풍이 변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탈린 상업학교에서 회화를 가르쳤다. 파울 라우드의 그림은 현재 에스토니아 아트 뮤지움을 대표하고 있다.



출처:

1. 위키피디아

2. 에스토니아 관광청 공식 홈페이지: https://www.visitestonia.com/en/

3. 네이치토르니 박물관&카페 공식 홈페이지: http://linnamuuseum.ee/neitsit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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