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올라프 교회, 해양 박물관, The Broken Line 기념비
정확한 설립연도는 아무도 모르지만 1267년 처음으로 기록되었으며 노르웨이 국왕이었던 *올라프 2세(Olaf II of Norway)에게 헌정하기 위해 지은 교회로, 주변에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커뮤니티가 있었다. 톰페아 언덕이 황무지인 상태에서 덴마크가 13세기 중반 성벽을 쌓고 완전한 요새를 만들기 이전에는 언덕 밑에 위치한 이 교회가 도시 중심이었다.
초기 건물의 디자인, 재료, 시기, 주인 등에 대한 기록은 없다. 첫 기록은 14세기에 진행된 대규모 재건축에 관한 내용이었다. 1330년에는 건물 재건축이, 1364년에는 첨탑이 완공되었다. 이후 15세기 초, 새 예배당이 완공되었지만 1433년 5월 11일 대화재를 겪으며 전소되었다.
1436년부터 1450년까지, 전소되었던 교회 건물이 안드레아스 쿨페수(Andreas Kulpesu)의 감독하에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다시 세워졌다. 이때 성 올라프 교회는 탈린에서 가장 큰 중세 건물이 되었고 현재 그 크기 그대로 남아있다. 이 공사에서 31미터 높이의 바실리카도 만들었는데 이는 발트 3국에서 가장 큰 규모다. 탑은 57미터의 높이로 완공되었다.
1500년 첨탑이 거의 두배 높이의 고딕 양식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첨탑을 높인 이유는 종교적인 믿음보다는 해상 표지(maritime mark)용이었다는 추측이 가장 많다. 소식통에 따르면 1549년부터 1625년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논란이 많은 것으로 보아 가장 높은 건물들 중 하나가 아녔을까 싶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올라프를 따라 처음엔 기독교회로 시작했지만 재건축과 함께 루터교로 바뀐다. 1523년엔 에스토니아 복음주의 루터교(Estonian Evangelical Lutheran Church)로, 1950년엔 침례교(Baptist)로 바뀐다. 현재도 침례교회로 운영 중이다.
특이점은 1944년부터 1991년까지 구소련의 KGB가 교회 첨탑을 감시용 라디오 탑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높이도 높이인 데다 네오고딕 양식으로 워낙 뾰족하게 디자인되어 천둥번개에 10번 정도 맞은 기록도 있다. 그중 1625년, 1820년, 1931년. 총 3번, 완전히 전소되었다. 재건축 공사가 많이 진행되었고 현재 첨탑의 총높이는 123.8 미터다.
첨탑 끝에는 계란 모양의 구와 십자가가 있다. 첨탑은 현재 관측대/전망대로 관광객에게 열려있는 공간이다. 중세시대 건물이다 보니 엘리베이터는 없고 232개의 계단을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다. 참고로 에스토니아의 대다수 관측대/전망대는 눈에 미끄러져 넘어지면 큰 사고가 나기 때문에 그런 사고를 방지하고자 겨울엔 운영하지 않는다(에스토니아 (행정)겨울은 보통 11월부터 3월이다. 실제로 에스토니아에 가면 11월을 '겨울'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르면 10월 중순부터 눈이 내리기 때문에 행정적으로는 11월부터 3월까지 '겨울'이라고 표기한다.).
탈린에는 해양 박물관이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올드타운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Fat Margaret 탑.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올드타운에서 좀 더 떨어진 항구에 위치한 Lennusadam.
Fat Margeret 탑을 개조해 만든 해양 박물관은 에스토니아 해양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탈린만(Bay)을 통해 침입하려는 외부인을 막기 위해 1511년부터 1530년까지 도시 성문을 재정비하면서 13세기에 완공된 해안문(The Great Coastal Gate) 옆에 Fat Margaret 탑을 만들었다. 수비할 목적으로 짓다 보니 도시 요새 중 가장 크게 만들어져 Fat(뚱뚱한, 두꺼운)이라고 이름 지었다. 석회암으로 만든 탑의 높이는 20미터, 가장 두꺼운 부분의 벽 두께는 약 5.5미터, 지름은 약 25미터다. Fat Margaret 탑 근처에 있는 6.8미터 높이의 Stolting Tower도 이때 완공되었다.
1683년부터 1704년까지 진행된 재공사로 대포 탑이 설치되었고, 18세기 후반엔 단순히 화약, 무기창고로 사용되다가 1830년 감옥으로 바뀌었다. 1884년 Fat Margaret 탑 남쪽에 교도소 행정건물로 사용할 추가 탑을 만들었다. *1917년 혁명 당시 근무자와 선원, 군인들에 의해 화재와 교도관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30년, 탈린 도시 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실제 선장과 선원들이 1935년에 해양 박물관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및 구소련의 지배 기간 동안엔 전시 장소가 계속 바뀌다가 1978년부터 80년까지 리노베이션 공사가 진행되어 1981년부터 관련 내용을 전시해오고 있다.
총 4층으로 에스토니아 해양과 낚시 역사를 전시해오고 있으며 옥상 전망대에서 올드타운과 탈린만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여름에는 옥상 전망대 시즌 카페가 열린다.
Fat Maraget 탑이 실제 배들을 전시할 수 있을 만큼 크지 않기에 2012년 봄, 약 100여 척의 실제 배를 전시한 큰 규모의 새로운 해양 박물관이 개장했다.
Lennusadam은 Fat Maraget 탑 근처, 수상비행기 항구(Seaplan Harbour)에 있는 구소련 시대에 만들어진 요새 중 한 곳인 *표트르 대재 나발 요새(Peter the Great's Naval Fortress) 내 비행기 항구(Aeroplane harbour)를 2010년 개조해 만들었다. 내부 크기는 8천 제곱미터로 약 2,420평이다. 외부 항구에도 직접 탈 수 있는 배들을 많이 전시해 놓았기 때문에 아마 내, 외부 크기를 다 합친다면 4천 평이 넘지 않을까 한다.
이 박물관의 가장 유명한 전시품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완성된 잠수함 렘비트(Lembit)다. 이 잠수함은 에스토니아 해군이 단 두 척을 소유하고 있는 칼레브(Kalev) 클래스 중 한 척이다. 다른 한 척은 침몰되어 바닷속으로 사라져 찾을 수 없지만, 현재 전시 된 이 잠수함은 발트 3국을 통틀어 세계 전쟁에 참전해서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의미 깊은 잠수함이다.
렘비트 말고도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해군 잠수함과 16세기에 에스토니아 본토와 섬 사레마를 연결해주던 목선의 잔해 등도 전시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전시품도 전시품이지만, 실제 잠수함에 타보거나, 에스토니아 해군 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 등, 해양 관련된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체험 요소를 곳곳에 잘 배치해서 관람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참고로 두 해양 박물관의 입장권은 따로 사야 하고 두 번째 해양 박물관은 생각보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게다가 두 번째 해양박물관으로 가는 동네가 한때 구소련 요새였기에 주변 경관이 썩 좋진 않다. 버스 타고 가다가 '여기가 맞나?'라는 생각이 들면 맞게 찾아가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1994년 9월 28일 수요일 저녁. '에스토니아' 페리(페리 이름이 '에스토니아')는 전날 오후 19:00시에 탈린을 출발해 다음날 오전 09:30분 스톡홀름 도착 예정이었다. 하지만 타이타닉 다음으로 가장 비극적인 선박사고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인명사고를 낸 에스토니아 페리 전복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발생 시간은 현지시간(UTC+2) 00:55분부터 01:50분. 탈린 - 스톡홀름행 에스토니아 크루즈 페리가 발틱해를 지나고 있었다. 페리에는 승객 803명, 선원 186명으로 총 989명이 타고 있었다. 승객들은 거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이었지만 선원 대부분은 에스토니아인이었다.
전복사고는 평소보다 더 매섭게 몰아친 발트해 가을 태풍이 시작이었다. 화물칸 내 화물 분배가 썩 좋지 않아 배는 약간 우현으로 틀어져 있던 상태였다. 실야 유로파(Silija Europa)의 선장이자 당시 구조대를 이끌었던 구조 단장인 에사 마켈라(Esa Mäkelä)에 따르면 배가 출발할 땐 '평소처럼 좋지 않은 상태'의 발트해 가을 태풍 기간이었다고 한다. 보통 발트해 태풍은 선박이 전복될 만큼 강하게 몰아치지 않아, 당시 운행 스케줄이 있던 모든 배는 태풍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전부 항해 중이었다.
하지만 사고 당시 풍속은 초당 15~20미터, 보퍼트 풍력 계급 7~8, 파도 높이 4~6미터였다. 페리는 평소와 똑같은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오전 01:00 즈음, 강한 파도가 함수문(bow doors)을 크게 때리며 쾅 소리가 난다. 그리고 몇 번 더 비슷한 소리가 났다는 승객과 선원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그러다 오전 01:15분경, 함수 문이 열리고 배가 갑작스럽게 우현으로 틀어지며 01:20분 사고 알람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01:30분경, 화물칸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에스토니아 호 주변으로 항해하던 선박들(Mayday, Silja Europa)이 레이더와 무전으로 사고를 인지했다. 곧바로 정확한 위치와 현재 상태에 대한 교신을 요구했지만, 이미 페리 엔진 4개가 기능을 잃기 시작해 제대로 된 교신이 불가능했다. 결국 에스토니아 호는 전복되고 852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757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사망한 852명의 국적은 스웨덴 501명, 에스토니아 285명, 라트비아 17명, 러시아 11명, 핀란드 10명, 노르웨이 6명, 덴마크 5명, 독일 5명, 리투아니아 3명, 모로코 2명, 벨라루스 1명, 캐나다 1명, 프랑스 1명, 네덜란드 1명, 나이지리아 1명, 우크라이나 1명, 영국 1명이다.
발트해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해(sea) 중 하나로 평균적으로 약 2,000 선박이 항상 항해하고 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선박들이 서로 교신을 통해 사고 발생 직후 승객들과 선원들을 구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사고 발생 위치를 파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첫 구조호(주변을 항해하던 선박 중 하나)인 마리엘라(Mariella)가 사고 발생 지점에 도착한 시간은 40분이나 지난 오전 02:12분. 마리엘라 호는 헬싱키 라디오로 긴급 구조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스웨덴, 핀란드의 헬리콥터 구조대가 오전 02:30분 도착했다.
사고 발생 직후, 에스토니아 호와 첫 교신을 한 선박이었던 메이데이(Mayday) 호가 발트해 구조센터인 MRCC Turku에 사고 무전을 보냈지만 구조센터는 상황을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건 발생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났고 배는 완전히 전복된 상태였기에 구조 헬리콥터가 도착했을 땐 이미 1/3이 사망했다. 구조작전은 최대한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핀란드 국경 구조대 소속 헬리콥터 조종사는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선 구조사다리를 내리는 것보다 선박에 직접 착륙하는 게 좋겠다는 결정하에 구조작전을 이어갔고 약 44명을 구출해냈다.
총생존자는 138명이지만 1명이 병원에서 사망해 137명이 되었다. 대부분의 생존자는 신체 건강하고 젊은 7세부터 55세의 남자들이었다. 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망자들은 당시 물의 온도가 섭씨 10~11도를 웃돌아 저체온증을 버텨내지 못했다고 한다. 마지막 실종자가 발견된 건 사고 발생 18개월 후. 사망자 중에는 유명한 에스토니아 락 밴드의 보컬인 우르마스 알렌데르(Urmas Alender)도 있다. 그는 4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해상 구조 방법과 구명보트의 변화를 이끌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Fat Margaret Tower에 추모비를 세우고, 타워 바로 옆, 공원을 만들었다. 또한 난파선의 잔해를 지키기 위해 1995년 에스토니아 협약(Estonia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은 당시 사망자들의 조국인 스웨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덴마크, 러시아, 영국이 사망자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난파선의 잔해를 찾으려 불법적으로 접근하는 업체나 다이버들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협약에 따른 법정 구속력은 이 협약에 동의한 국가들의 국민에게만 영향력을 끼친다. 실제로 스웨덴 해군이 불법 다이빙 활동을 검거한 적이 있다. 현재 이 지역은 핀란드 해군이 보호, 감시하고 있다.
최근에 발표된 스웨덴 매체에 따르면, 구소련 군의 기술품을 밀반입하기 위해 만든 화물칸 내 밀수품 비밀장소 때문에 45분 만에 빠르게 전복되었다고 한다. 폭탄이 터져 배에 구멍이 생긴 부분도 확인되었다. 해당 내용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루머로만 떠돌다가, 당시 스톡홀름 관세지역을 총괄하던 렌나르트 헨릭손(Lennart Henriksson)의 양심선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관련기사: https://www.facts-are-facts.com/article/ill-fated-estonia-ferry-used-for-weapons-transfers
*성 올라프 교회와 해양 박물관은 사진칩을 잃어버려서 다 퍼왔습니다.
메인사진: ⓒMaret Põldveer, Tallinna Ettevõtlusameti turismiosakond
▶올라프 2세(Olaf II Haraldsson) 995년 출생 ~ 1030년 7월 29일 사망
노르웨이 왕(1015년 ~ 1028년)으로 사후 '노르웨이의 영원한 왕(Rex Perpetuus Norvegiae)'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올라프의 전설'로 유명하다. 노르웨이의 로맨틱 민족주의(Romantic nationalism, 1840~1867: 예술, 문화 등지에서 일어난 노르웨이 민족 정체성의 전통성을 강조하던 시기)가 일어났을 무렵, 노르웨이의 독립과 자긍심을 대표하는 심볼이 되었다
▶1917년 혁명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정부의 실패가 발발이 된 혁명으로 에스토니아 임시 정부가 수립되고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일어난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의 시발점이 된 혁명이다.
▶표트르 대재 나발 요새(Peter the Great's Naval Fortress)
탈린과 헬싱키 항구 근처에 위치한 요새로, 당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의 해양 진입을 막기 위해 발트해가 가장 좁아지는 부분에 만들어졌다.
출처:
1. 위키피디아
2. 에스토니아 관광청 공식 홈페이지 https://www.visitestonia.com/
3. Lennusadam 공식 홈페이지 http://meremuuseum.ee/lennusad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