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majõgi(엄마의 강)
타르투는 에스토니아의 제 2 도시이자 교육의 도시다. 도시 내 상당수의 건물이 대학 건물이며 학기 중에만 사람이 많은 편이다. 에스토니아는 크게 남, 북으로 나뉘어 주변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북부는 탈린이 수도 역할을, 남부에서는 타르투가 수도 역할을 맡았었다. 에스토니아 대법원과 국립 박물관은 수도 탈린이 아니라 타르투에 있다.
도시 내 축제는 주로 학기 중에 배정되어있어 방학기간에는 큰 축제나 행사가 없는 편이고 물가가 오르는 기간도 학기가 막 시작되기 직전이다.
기원후 약 600년, 톰메언덕(Toome Hill, Toomemägi) 동쪽에 타르바투(Tarbatu) 이름의 요새가 세워졌다.
1030년 키예프 왕자(The Kievan prince) 야로슬라브(Yaroslav the Wise) 1세가 타르바투의 요새에, 본인의 요새를 덧 세우고 유르예브(Jurjev)라고 이름지었다. 이 기록은 타르투 최초의 역사 기록이다.
1061년 에스토니아가 요새를 되찾았지만, 1234년 리보니안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가 타르투를 장악했다. 그리고 10년 후인 1234년, 톰메언덕(Toome Hill)에 첫 석조 요새가 만들어졌다.
1262년, 알렉산데르 네브스키(Alexander Nevski)의 아들인 노브고로드(Novgorod) 드미트리의 왕자 군대(The army of Prince Dmitri)가 침략했다. 하지만 톰메언덕에 있는 요새를 점령하는데는 실패했다. 타르투 시민을 약탈한 후 새로운 석조 요새를 언덕 아래에 만들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러시아와 독일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정확한 연도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1280년대, 타르투는 한자동맹에 가입해 탈린처럼 무역도시로 급부상하기 시작한다.
1525년 독일 루터교인들이 타르투에 도착해 무력으로 도시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 때 톰메언덕에 있는 교구 대성당(The Diocesan Cathedral)이 파괴되었고 일부 주민은 주교(Bishop)가 거주하던 지역을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보니안 전쟁(1558-1583)발발 이전에는 타르투 거주민이 약 6,000명이었다.
1558년 이반 4세(Ivan IV Vasilyevich, Ivan the Terrible)의 군대가 리보니안 전쟁을 일으켰다. 타르투 주교는 모스크바 감옥에 수감되었고 타르투를 포함한 중세시대 리보니아 소속의 소도시들의 주교권이 박탈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타르투는 폴란드, 스웨덴, 덴마크, 리보니아 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582년 *얌-자폴스키(Y(J)am-Zapolsky) 평화조약(The Jam Zapolski Peace Treaty)을 통해 타르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 소속이 된다. 그리고 1년 뒤, 1583년 예수회(Jesuit) 거주지가 만들어졌다. 이때 폴란드 왕이었던 스테판 바토리(Stephen Báthory)가 폴란드 국기와 똑같은 디자인의 기를 타르투 도시 깃발로 지정했다. 이 기는 현재 타르투 도시 문양이 중간에 들어간 디자인으로 변형되어 사용중이다.
1600년부터 1629년까지(1600-1611, 1617-1618, 1620-1625, 1629-1629)*스웨덴과 폴란드가 리보니아 지역에서 총 4차례에 걸쳐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타르투 1600년부터 1603년까지는 스웨덴의 지배를, 1603년부터 1625년까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지배를, 1625년에는 다시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1631년 에스토니아 최초 출판회사(the Printing House)가 타르투에 설립되었고 1년 뒤 1632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아돌프2세가 타르투 대학을 설립했다.
1656년부터 1661년, 스웨덴과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켰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가 이 기간동안 타르투를 지배했다.
1648년부터 1688년, 타르투 근처에 에스토니아 최초로 교사들을 양성하는 *포셀리우스 신학대학(Forselius Seminary)이 설립었다.
1704년 표트르 대제는 대북방 전쟁(700-1721)기간 동안 타르투를 차지하기 위해서 러시아 군을 개인적으로 이끌고 타르투를 침략했다. 대북방전쟁이 끝난 연도인 1721년에는 타르투 전체인구가 채 21명도 안됐다고 전해진다. 또한 1708년, 1763년, 1775년 세 차례의 대 화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중세건물 대부분의 전소되었으며 도시 재건설은 후기 바로크와 클래식 양식으로 진행되었다.
1789년에 기록된 타르투 인구는 3,421명이다.
1802년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더 1세(Tsar Aleksander I)의 승인하에 타르투 대학이 다시 문을 열었으며 1854년 타르투 인구가 약 13,000명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타르투는 에스토니아 민족정신 각성운동(National awakening)의 시발점이 되었고 1869년 에스토니아 최대규모의 음악 축제인 라울루피두(Laulupidu)가 타르투에서 최초로 개최되었다.
1870년 에스토니아 최초 국립 극장 바네무이네(Vanemuine)가 설립되고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한 명인 리디아 코이둘라(Lydia Koidula)의 코미디: 사레마 음식(Saaremaa Cousin)이 공연되었다.
1872년 에스토니아 작가 협회가 만들어졌고 1900년대 타르투 주민이 약 40,000명으로 늘어났다.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정치, 사회에 대한 불만이 혁명이 일어났다.
1909년 에스토니아 국립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1917년 러시아 볼쉐비키가 에스토니아를 점령했고, 2년 뒤인 1918년 2월 24일, 에스토니아가 러시아로부터 1차 독립을 하게 된다. 하지만 1918년부터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구소련군은 타르투에게 독립권을 주지 않았고 1919년 1월 14일, 에스토니아 군대가 탈린에서 내려와 독립권을 두고 싸운 에스토니아와 구소련간의 전쟁이 타르투에서 일어났다. 타르투(Tartu)라는 도시 이름은 1918년부터 사용되어오고 있다.
1919년 12월 1일 타르투 대학은 에스토니아어로 진행하는 수업을 시작했으며 1920년 2월 2일, 에스토니아군과 구소련군의 타르투 평화 조약(The Tartu Peace Treaty)이 이루어졌다.
1920년 10월 14일 핀란드 군과 구소련군의 다시 타르투 평화 조약에 서명하고 1932년 에스토니아와 구소련의 불가침(불침략, non-aggression) 조약이 만들어졌다.
1940년 6월 소련의 붉은 군대(rhe Red Army)가 에스토니아를 지배했다. 그리고 1년뒤 1941년 6월 약 10,000명이 넘는 에스토니아인이 러시아 시베리아로 강제 유배되었다. 그들 중 약 70%는 여성과 어른이들, 노인들이었다. 약 한달 뒤 타르투는 나치 독일로 넘어가게 되었지만 1944년 구소련이 또다시 에스토니아를 지배했다.
1949년 타르투 주민수는 약 57,000명이 되었다.
1949년 3월 25일과 26일. 또다시 10,000여명의 에스토니아인들이 러시아 시베리아로 강제유배 되었다. 1950년 타르투 주민수는 1년 전보다 2천여명 정도가 준 약 55,500명이 되었고 1977년 약 100,000이 된다.
1986년과 1987년 에스토니아의 두번째 민족정신 각성운동이 타르투에서 시작되었고 1988년 소련의 붕괴가 시작되자 타르투에서는 에스토니아 국기를 계양하기 시작했다.
1991년 에스토니아의 두번째 독립이 확정되자 1993년 구소련 군이 타르투에서 철회했다. 그 해 가을 에스토니아 대법원이 타르투에 재설립 되었고 2016년 에스토니아 국립 박물관의 메인빌딩이 완공되었다. 이는 에스토니아 독립을 위한 프로젝트 중 가장 큰 프로젝트였다.
타르투에는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강 중 하나인 엠마으기(Emajõgi)가 흐른다. 이 강은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호수 두개를 잇는 강으로 타르투가 도시로 번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엠마(Ema)는 '엄마'라는 뜻이고 으기(Jõgi)는 '강'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일반적인 도시 내 강과는 다르게 여름만 되면 수영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며, 계절을 가리지 않고 낚시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다.
엠마으기를 중심으로 서울의 강남/강북처럼 지역이 나뉘는 편이지만 편싸움은 없다. 다만 강북쪽으로는 관광지나 볼거리가 거의 없고 현지 주민들이 모여사는 곳이 대부분이라 시즌마다 오르는 집값에 차이가 좀 있는 편이다. 일반적으로는 강의 북쪽부분이 더 저렴한 편이지만, 강을 바로 볼 수 있는 강가에 위치한 강북 주택들은 올드타운 중심보다 훨씬 더 비싸다. 러시아인 동네도 강북쪽에 있다.
여름시즌에는 금액마다 루트가 다른 엠마으기 강 페리와 아래 사진에 나오는 레스토랑이 문을 연다. 그리고 강 주변으로 시즌 노천카페와 크고 작은 축제가 많이 생기는 편이다. 밑에 나오는 레스토랑은 엠마으기 강에 딱 하나 있는 수상레스토랑으로 주로 저녁 라이브카페로 문을 열지만, 점심에는 가벼운 샐러드, 음료를 팔기도 한다. 음악은 주로 잔잔한 재즈풍이 많으며 라이브 스케줄은 따로 없고 앞쪽 입간판에 당일날 적어 놓는 편이다. 분위기가 엄청 좋으니 재즈를 좋아한다면 한 번 가보는 것도 추천한다.
엠마으기는 총 길이 약 100km로 에스토니아에서 두번째로 긴 강이며, 이 중 타르투 도시내에 흐르는 총 길이는 1/10 정도인 약 10km이다.
*얌-자폴스키(Y(J)am-Zapolsky) 평화조약(The Jam Zapolski Peace Treaty)
1582년 리보니아 전쟁의 종전 계기가 된 조약 중 하나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 러시아간의 평화조약. 스테판 바토리가 이끌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리보니안 전쟁 승리를 이끈 계기이기도 하다.
*스웨덴vs폴란드 전쟁
1600년부터 1626년까지 총 4번(1600-1611, 1617-1618, 1620-1625, 1629-1629), 스웨덴이 지금의 라트비아 발호프(Wallhof/당시 리보니아 지역)에서 일으킨 전쟁. 폴란드의 알트마르크(Altmark, 현: Stary Targ)에서 알트마르크 휴전(Truce of Altmark)으로 종전되었다.
*포셀리우스(Bengt Gottfried Forselius 1660년대 출생 ~ 1688년 11월 16일 사망)
핀란드에서 에스토니아로 넘어온 스웨덴계 아버지를 둔 에스토니아인이자 에스토니아 공교육 설립자로,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하르유 마디세(Harju-Madise)에서 태어났으며 에스토니아 철자책(ABC Book)을 최초로 출판한 인물이기도 하다. 요한 호르눈그(Johan Hornung)와 함께 독일어 영향을 많이 받은 에스토니아 알파벳과, 일부 독일 문법을 제외시킨 에스토니아 문어(literary language)를 좀 더 배우기 쉽고, 가르치기 쉽게 만들었다. 부모님의 영향과, 당시 에스토니아 학교에서 주로 사용하던 독일어의 영향으로 모국어인 에스토니아어만큼 스웨덴어와 독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탈린 짐나시움(Reval(Tallinn) Gymnasium)에서 초기 공교육을 수학했으며 독일 할레-비텐베르크(Halle-Wittenberg)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1684년 에스토니아로 돌아와 에스토니아 최초 교사양성 학교인 '포셀리우스 대학'을 설립했다. 학교는 약 2년간 운영되었지만 학비가 비싸고 스웨덴 군인에 의해 운영되었기 때문에 당시 주변 평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1688년 사망했을 땐, 그가 세운 학교가 리보니안령 에스토니아(에스토니아 남부)에는 38개가 있었고 신입생은 약 800여명이나 되었으며, 스웨덴령 에스토니아(에스토니아 북부)에는 8개의 학교와 약 200명의 신입생이 있었다. 1898년, 포셀리우스 덕에 에스토니아 문해율(literate)은 전체인구의 약 97퍼센트였다고한다.
출처:
1. 위키피디아
2. 타르투 공식 홈페이지: https://www.tartu.ee/en/history-of-tartu
3. 인유어포켓: https://www.inyourpocket.com/tartu/Tartu-history
4. 타르투호텔: http://tartuhotell.ee/en/tartu/ajalugu/
5. 에스토니아 여행 가이드(독일): http://www.estlandia.de/en/tourism-estonia/cities/tartu/history.html
6. 타르투 관광청 공식 홈페이지: http://visittartu.com/en/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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