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에서 보내는 짧은 글 시리즈
오늘은 내가 어쩌다 브런치에 적히는 ‘개발자’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는지 얘기해봐야겠다. 프로필에 ‘개발자’라고 적힌 것은 어떻게 바꾸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부끄럽다.
내 인생에 개발이 들어온지는 얼마 안 됐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20살 때니까 이제 거의 10년 가까이 돼간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 까지는 그저 조립하고, 새 전자제품을 사면 이것저것 해보는 것을 좋아하는 그 당시에 특이한 여자애에 불과했고, 코딩 혹은 프로그래밍이라는 것은 그저 우리 학교 1등 하는 남자애가 학과를 컴공과를 지망한다고 해서 어렴풋이 들어봤던 것에 불과했다.
학생 때 나는 생명과를 지망하고 있었다. 생물이 제일 재미있었고, 고등학생 때 소모임을 만들어 일반생물 스터디를 하기도 했었다. 대학교도 생명과를 지망해 들어갔다. 그때는 생명과학 연구원이 될 줄 알았다.
내가 입학한 대학교는 과를 선택해 입학하지 않는 학교였다. 1학년들은 그래서 다양한 공통 과목들을 배웠다. 1학년 때 최대한 다양한 과목을 배워보고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면 되었다. 예상한 대로 수학도, 화학도, 물리도 모두 잼병이었다. TMI지만 물리는 정말 끝에서 20등 정도 한 것 같다.
가을학기 때 CS101, 즉 프로그래밍 기초 수업을 듣게 되었을 때, 내 안에는 어떤 기대도, 감정도 없었던 것 같다. 그냥 꼭 들어야 하는 과목 정도? 그런데 웬걸, 처음 접해 본 프로그래밍은 너무 재미있었다. 마치 퍼즐을 푸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씽크빅이라는 방문 문제집을 풀었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다. 그런데 프로그래밍은 마치 씽크빅 문제를 푸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나하나 조립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남동생들이 로봇을 사면 내가 먼저 까서 조립해서 주던 시절같이, 나는 프로그래밍이 주는 성취감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전공은 생명과를 선택했다. 한 학기 한 과목만을 듣고 전산과를 선택하기에는, 내가 그동안 생물에 들인 정이 더 많았다. 오랜 친구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명과에 갔다.
생명과 수업은 재미있었다. 다만, 내 머리의 용량이 도저히 그 학문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생명과 전공과목들을 열심히 수강하고, 공부하고, 외웠지만 거의 항상 B- 에서 C+ 정도를 받았다. 시험 기간에는 시험 범위를 모두 소화할 수 없어 절반은 포기하고 공부하기도 했다. 절대적으로 같은 과 친구들보다 잘 안 됐다. 그 맞지 않음을 느끼는 시간 동안 내 머리 한켠에서는 1학년 때 겪었던 프로그래밍이 종종 생각났다. 프로그래밍 재미있었는데… 하고 말이다.
2학년 겨울방학, 개별 연구를 경험해보고자 생명과 연구실에 컨택을 했다. 궁금했던 분야 연구실이었는데 좀 잘 나가는(?) 랩이었다. 생명과가 자꾸 아닌 것 같은 생각에 연구실이라도 들어가 보면 다를까 싶어 컨택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전산과를 도전해보자는 결심이 들어 교수님께 다시 연락했다. 전과를 고민하게 되어 개별 연구를 하기 어렵겠다고. 그 당시 어떤 결심의 계기가 있었는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1년 동안 계속 프로그래밍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던 것이 컸던 것 같다. 또 생명과는 잘 안 맞는 것 같고, 다른 과를 알아보자니 잘 못하는 물리, 수학, 화학을 제치고 나니 전산과와 디자인과 밖에 남지 않았었다. 그렇게 프로그래밍 한 번 배워보고 싶은데… 하는 마음과 생명과에서 떠나 살길을 찾고자 하는 현실적인 이유로 전산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전산과 수업을 한 학기 들어보기로 결심했다. 해보지도 않은 길을 넙죽 선택하기엔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3학년 첫 학기를 생명과 전공 대신 전산과 전공으로 채웠다. 아직 생명과인 상태였다. 보통 전산과 첫 학기에 듣는 전공 필수 두 과목과 더불어, 첫 전필 2개를 듣고 나서 듣는 전공 선택 과목을 하나 더 수강했다. 그땐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코딩이라고는 한 학기 python 조금 해 본 쪼랩이 심화 과목을 듣겠다니. 아마 전과 때문에 졸업이 늦어질까 봐 걱정도 했을 테고, 이왕 하는 김에 한 학기 내에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체험해보자는 마음도 있었을 거다.
전공 필수 세 과목을 한 번에 듣는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웠다. 특히 전공 선택 과목은 신세계였다. C를 모르는 채로 C로 시스템 프로그래밍 과제를 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1년 늦게 듣다보니 같이 수강하는 동기들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거의 모든 과목을 솔플하거나, 후배들하고 들었던 것 같다. 물론 주변에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물어가면서 수강을 했다.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너무 재미있었다! 어려운 과목일수록, 프로그래밍을 더 많이 하는 과목일수록 재미있었고 성취감이 엄청났다. 생명과학에게 미안하게도 생명과에 대한 생각은 1도 안 났다. 내 짝을 찾은 것 같았다.
성적도 따라왔다. 생명과에서는 절대 구경해보지 못한 성적들을 받았다. 그 학기 성적이 나의 최고 학점이었다. 그다음 학기 나는 프로그래밍을 하는 학과로 전과하게 되었다.
솔직히 전과 후에도 왜 더 일찍 전과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잘 맞을 것을 왜 진작 코딩을 해보지 못했을까. 고등학교 때부터 코딩을 해온 과 사람들을 보며 부럽기도 했다. 왜 내 시절엔 코딩이 교육과정에 없었으며, 나는 왜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을까. 나도 더 일찍부터 했더라면 더 잘했을 텐데 같은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부는 코딩 교육 바람이나, 국비지원 사업과 같이 코딩을 더 일찍, 더 쉽게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도 걱정되는 부분은 있지만 말이다. (여기에도 할 말은 많다)
아무튼 내 인생에 프로그래밍이 자리 잡게 된 지 이제 10년이 다 되어간다. 20살 때까지는 상상도 못 한 나의 진로였는데, 30살이 가까워지자 개발자라는 호칭이 내게 붙는다. 물론 지금도 계속 고민한다. 개발자가 나의 천직일까? 나는 개발을 정말 진심으로 좋아할까? 그저 퍼즐 맞추고 퍼즐 완성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요즘은, 다른 무엇보다 개발을 하고 있으면 집중도 잘 되고, 시간도 잘 간다. 무엇보다 개발을 통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에 기쁘다. 개발이라는 안 가본 길에 발 디뎌 준 22살의 내게 고맙다. 덕분에 재미있게 일하며 살고 있다고, 내 인생에 개발이라는 키워드를 끼워 넣어줘서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