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의 정점

우리는 주술처럼. 해변의 사막에서 자신의 훗날을 점칠 수 있다.

by 류인환

퇴근 후 늦은 밤 잠들기 전 영화를 보곤 해. 영상이 흐르기 전 서로 꼬리를 물며 돌아가는 버퍼링 고리가 태엽처럼 화면을 채웠어. 다음날 해와 달이 원형으로 태엽을 감아 눈앞에 펼쳐지는 낮과 밤의 일상. 그곳은 해변이야. 아침이 되면 업무가 파도로 휘몰아쳐. 밤. 업무가 대양 저편으로 밀려나면 모래 바닥에서 생활의 민낯이 드러내곤 해. 밀물과 썰물이 엉키는 일과 생활의 리듬은 분명해서 나는 경계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어.


하지만 가끔 기적처럼 물살이 멈췄을 때. 모래가 가라앉는 정적이 찾아와. 그 마술 같은 순간에는 물결이 투명해져서 진주를 발견하듯 정적의 정점을 맞이하게 돼. 일생동안 반복되는 그 짧은 순간에 대응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주술처럼 해변의 사막에서 자신의 훗날을 점칠 수 있어.




봄의 시작. 낮의 일정이 연장된 새벽. 머릿속은 일의 여정으로 물들어 있어. 하루 종일 손과 머리를 쥐어 짜낸 뒤 터벅터벅 침대로 귀가하는 연속에 안정되어 살고 있는 날. 첫 번 째 정적과 마주치게 되었어.


빡빡한 주중. 예기치 않게 일찍 회사 밖을 나왔어. 버스 안. 햇살은 아직 쨍쨍해. 사람들이 짹짹거리며 수다를 떠는 어색한 풍경.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보았어. 흰색 차선은 화살이 되어 창에 비친 내 몸을 반복해서 찌르는 것 같아. 지금 집에 가도 되냐는 듯.


밤새 메마른 콘택트렌즈에 먼지가 더해 탁해졌어. 사물에 빛이 새기 시작해. 창밖의 차들 가로수들 그리고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검은 머릿결에 무지개가 맺혀 길게 늘어졌어. 낡은 건물의 간판 글씨도 포토샵 모션 블러처럼 길게 퍼졌어. 이렇게 적혀있었어. 친구와 맥주 한 잔.


셔틀버스는 나를 무심히 집 앞에 배달했어. 집 안 뜨거운 햇살과 텁텁한 공기를 블라인드로 팽팽히 걸어 잠그고는 얼굴을 베개에 묻었어. 온몸에 힘을 쭉 빼니 발끝부터 손끝까지 전율이 차올라. 쾌감에 한참 킥킥대다 생각이 들었어. 누가 보면 정신 나간 사람 같다는 걸.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뭘 해볼까. 백색 방 안 정적의 시간에는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어. 흰 천장을 맞대어 면벽하는 시간.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맴돌다 결국 다시 일의 여정이 떠올랐어.




이른 여름. 금요일 밤. 내일은 지각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느새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 광활한 사무실. 오직 내 자리에만 불이 켜졌어. 공연장의 헤드라이트처럼. 스케치를 끄적이는 지금. 바깥 비가 잔잔하게 리듬을 내고 있어. 무한한 시간. 조용한 공기. 포근한 조명. 쾌적한 온도. 마음껏 곱씹으며 생각하는 이 순간 행복한 기분이 들어. 그래서 일을 끝마치고도 조금 더 의자에 앉아 있었어. 만족스러운 창조물과 함께.


그 꿈틀대는 싹은 나를 붙잡고 집착하게 만들어. 이것이 무언가를 이루어 줄 것처럼. 택시를 타고 밤거리를 질주하는 동안 기사님이 거는 말소리가 빗소리보다 희미하게 들려. 대신 스케치들이 주위를 덮어. 길을 걷는 동안에도. 샤워를 하는 동안 증기로 흐려진 거울에도 그것들이 보여. 새벽까지 상상에 빠져 잠 못 들곤 해.


그런데 사실 다음 날 결과는 늘 처절해. 짓이겨진 떡잎 시체들을 파쇄기에 집어넣어. 그렇게 스스로에게 유린당해도 내일 파쇄될 출력물을 붙잡고 오늘 또 잠을 이루지 못해. 이유는 아무래도 이 희망고문을 벗어날 자신이 없거나, 벗어나 그만큼 행복할 다른 것이 전혀 없거나.




한 여름 주말. 죽은 듯 잠을 잤어. 밤이 오면 짓눌린 편두통을 안고 밖을 나서. 해 지는 한강에는 흐릿하게 형체로 뭉쳐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어. 자리에 앉아 오랫동안 한강을 보고 싶었는데, 왠지 그들 옆에 앉지 못했어. 대신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노래를 듣다 볼륨을 껐어. 노래가 흐르는 카페를 지나는 것처럼 곳곳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사라져. 걷다 보니 외딴 길에는 인적도 발자국도 없어. 대신 남색 강. 청록색 하늘. 그리고 별안간 기대하지 못한 폭죽이 별처럼 맺힌 아름다운 한 여름밤. 막다른 길에 닿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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