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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Oct 26. 2019

청색의 큐피드 - 2

“내 납 화살은 감정과 기억을 사라지게 해.”

 청색의 큐피드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 집이 마음에 들어?" 옹알거리는 입술 대신 목소리는 목욕탕의 벽 곳곳에서 증기처럼 밀려왔다. 낮은 목소리는 물의 진동처럼 젖은 피부에 부딪혔다. 나는 스며드는 추위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제가 원하던 그대로예요." 큐피드는 입술을 씰룩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벽에서 또 한 번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이 집에서 태어났어.”


 "중개인 말로는 이 집은 새로 지은 건물이라던데요." 내 질문에 큐피드는 몸을 돌려 다가와 짙은 눈동자로 나를 훑어보며 말했다. “나는 예전부터 존재했어. 단지 이 집이 날 이런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거야. 나는 너와 비슷한 나이일 거야. 넌 몇 살이니?" 그의 질문에 나는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나이가 기억나지 않는다. 큐피드의 큼지막한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짐작했다. “아마 서른이 조금 넘지 않았을까요. 이상하게도 나이가 기억나지 않아요. 그리고 방금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방금 전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아마 내 화살 때문일 거야.” 큐피드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네 등을 봐.” 나는 황급히 등을 더듬었다. 등 한가운데 박힌 두터운 막대가 느껴졌다. 몸을 틀어 큐피드의 동공에 등을 비춰보았다. 쇠파이프처럼 두터운 푸른색 화살이 박혀 있다. “내게 무슨 짓을 한건 가요? 그나저나 아프진 않네요!” 간신히 화살을 뽑아내고 두 손으로 들쳐보았다. 화살촉은 반쯤 부러졌다. 나머지 반은 여전히 내 몸에 박힌 모양이다. “뽑아내도 소용없어.” 큐피드는 어느새 내 등 뒤로 밀착하고는 상처를 매만졌다. “왜 내게 화살을 쐈나요? 그리고 난 어떻게 된 건가요?” “미안해.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화살을 맞아야 날 볼 수 있거든.”


 나는 큐피드의 손길을 뿌리치고 뒤돌아섰다. “화살을 맞으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잖아요! 난 왜 공중에 뜬 채로 당신과 대화하고 있고, 욕탕 안의 사람들을 우리를 의식하지도 않나요.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에게 말을 내뱉던 도중에 묘한 기분이 밀려왔다. 큐피드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날 지켜보고 있다. “당신이 내게 몹쓸 짓을 했는데, 난 왜 화가 나지도, 두렵지도 않은 건가요?” 내 처연한 말투에 그제야 큐피드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납 화살은 감정과 기억을 사라지게 해.” 그는 내 팔을 잡으며 짙은 남색의 눈을 갖다 대며 애정 어린 눈길로 말했다. “이번에도 너는 기분이 좀 나아졌니?”




 오래전에 병원에 있던 아버지가 숨을 멎었다. 예전부터 아버지는 병약했고 큰 수술을 받은 뒤로부턴 병원에 들리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늘 궂은일을 도맡았고 이십 대의 내가 들지 못하는 물건들을 더 왜소한 몸으로 번쩍 짊어지곤 했다. 그런 모습에 나는 한밤중 그의 심장에서 재깍재깍 울리는 인공판막 소리를 더는 주시하지 않게 되었고, 혹시 정적이 흐를 때면 그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대던 습관도 사라졌다.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고서는 그가 앓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식. 그리고 원인 모를 병을 앓고 있다는 것. 이제 괜찮아질 거란 것. 그래서 곧 퇴원할 수 있을 거란 것. 그러다 다시 악화되었단 것. 그래서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는 그런 심술 섞인 변덕에 나는 몇 번이나 침묵 가득한 새벽 기차를 타고 황급히 집으로 내려갔고 한낯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다시 회사를 향해야 했다.


 겁먹은 짐승처럼 병원을 뛰어다니는 가족들 사이에서 나는 외지인이 되어 아버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병원을 떠났고 며칠 뒤 아버지가 숨을 멎었다는 소식에 회사를 나와 양복을 챙기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슬픔을 회피하려 노력했다. 장례식장에서 누군가는 내게 너무 태연해 보여 놀라웠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그렇게 씩씩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명절 때마다 기차를 타고 집에 내려오면 무거운 침묵과 방문 안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를 마주해야 했다. 묘비 앞에서, 처음에는 아버지의 헌신적인 삶을 따르겠다고 예찬했다. 그러다 몇 년 뒤엔 아버지의 무책임한 면을 닮지 않겠다 분노했고, 지금은 그저 내게 아버지란 희미한 추억일 뿐이다.


 처음 꿈에 아버지가 나타났을 때는 얼싸안고 울먹였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도 꽤 꿈에 나타났고 언젠가부턴 그와 예전 같은 평범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언젠가부턴 아버지의 제사, 벌초 같은 것들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런 형식적인 걸 강요하는 친척들에게 부담감과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매정한 아들이라 했겠지만 이젠 그 질타마저 내겐 부질없었다. 어느새 감정을 아끼는 법을 배웠다.


 그 이후 사람들은 가끔씩 드러나는 내 덤덤한 말투에 흠칫 놀라곤 했다. 누굴 사귄다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녀들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고 사람들이 날 부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보다 꽤 태연한 척을 할 수 있었다.




 큐피드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욕탕 벽으로 사라졌다. 등을 매만졌다. 부러진 화살촉은 녹아버린 듯 사라졌고 베인 상처는 아물기 시작했다. 큐피드가 사라진 벽 위로 그의 잔상이 떠올랐다.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그의 푸른 얼굴이 뚜렷이 기억난다. 낯익은 오래전 친구처럼. 나는 욕탕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젖은 가운을 걸쳐 매고 호실로 돌아왔다. 개운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기지개를 켰을 때, 의문이 들었다. 방금 나는 어딜 갔다 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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