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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Oct 26. 2019

청색의 큐피드 - 1

큐피드. 신화에 비해 그는 사랑스럽다거나 살가운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도시 외곽으로 집을 옮겼다. 늦은 밤. 5차선 차로의 우측 갈래길로 들어서자 건물들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5분을 더 이동했을까. 넓은 공터가 보인다.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발목까지 자라난 잔디를 밟으며 집으로 걸어갔다. 진회색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새로 지은 빌라.


 검은 철문을 열고 들어온 1층 실내는 작은 호텔의 로비 같았다. 내부의 벽은 바깥과 같았다. 실내를 밝히는 조명 외에는 어떤 장식도 없는 콘크리트 벽은 제 나름의 물결과 얼룩 그대로 벽지가 되었다. 입구 맞은편 벽에 카운터 용도로 보이는 석재 단상이 놓여있다. 지금은 늦은 밤. 서 있는 사람은 없다. 라운지에는 남색 유리를 덮은 검은 철제 프레임의 원형 테이블이 곳곳에 배열되었다. 테이블 사이로는 공간을 구획하듯 묵직한 콘크리트 화분이 점으로 세워졌다. 두터운 파초 잎은 남색 유리 테이블만큼 짙다.


 카운터를 가로질러 우측 계단을 올라서는 동안 바닥을 덮은 진회색의 카펫타일은 걸음소리를 묻었다. 서벅서벅 눈 덮인 겨울길을 걷는 기분이다. 2층 복도 사이로 호실 문이 늘어섰다. 현관과 같은 호실의 철제문은 골판지를 접어놓은 것처럼 요철이 세로로 빼곡하게 접혀 꽤 견고해 보였다. 호실을 지나칠 때마다 각각의 철제문은 어둠 속 블라인드 채광처럼 세로로 번뜩이는 광택을 점잖이 드러냈다. 그래서 하루를 마치고 집안으로 향하는 매번의 걸음마다 마치 다른 세계를 향한 통로를 걷는 기분이 든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 나는 그곳 호실 중 한 곳에 살고 있다.


 처음 이곳 라운지를 방문했을 때, 차가운 페브릭과 석재 질감 그리고 그것들의 묵직한 일체감에 매료되었다.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미처 세부적인 것을 짚어보기도 전에 서둘러 구입을 결정해버렸다. 중개인 역시 집에 대한 조언이라던지 세세한 특징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이 '검은 집'이 깊은 명상과 휴식을 위해 지어졌고 이곳을 지내다 보면 특별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고 자랑스레 말하곤 떠났다.




 침대에 누워있다. 잠이 쏟아질 무렵 저 먼 곳에서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스며 나왔다.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기척에 의문이 들었다. 자는 동안 가위에 눌린 건 아닐까. 그래서 환청이 들리는 거라 단정 지었다. 나는 깰 요량으로 힘껏 이불을 떨쳐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말소리는 여전했다. 라운지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듯했다. 가운을 걸치고 호실 문을 열고 나와 슬리퍼를 신은 채 1층으로 내려갔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2층 복도로 올라서는 와중에도 여전히 말소리가 들렸다. 3층으로 올라서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그곳으로 올라간 적이 없었다.


 3층 입구는 거대한 미닫이 문으로 막혀있었다. 문틀 아래에는 검은 목재마루가 깔려있다. 나는 자연스럽게 백색 슬리퍼를 벗어 그 옆에 세워진 목재 신발장에 넣었다. 이미 신발 몇 개가 채워졌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이다. 문을 힘껏 열자 백색 증기가 스며 나왔다. 코로 밀려드는 더운 입자에 황급히 고개를 내뺐다. 안쪽은 목욕탕 같다. 바닥과 벽 모두 검은 석재타일로 마감되었다. 조심스레 딛는 맨발 바닥에 부드러운 셰일 암석 질감이 느껴진다. 중앙의 목조 평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서랍장, 오른쪽에는 세 개의 샤워부스가 있다. 검은 방수 커튼이 샤워실 내부를 무릎까지 가렸다. 부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상 너머로 거대한 커튼이 왼쪽 벽부터 오른쪽까지 횡으로 둘러져 있다. 증기로 주름진 손가락으로 커튼을 매만져보았다. 얇은 목조각을 검은 실로 엮어 만들었다. 풍부한 증기는 그 조밀한 검은 목재판 사이로 밀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함께. 이곳이다. 커튼을 걷어냈다. 욕탕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람들이 있다. 남편과 부인 그리고 세 명의 아이. 그들은 2층의 다른 호실에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낯선 사람들은 욕실에 몸을 담그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아이들 몇은 주위를 오가고 있었다.


 이곳은 목욕탕이라기보다 온천에 가까웠다. 모든 창문이 날개를 핀 듯 활짝 열려있다. 그 통로로 바깥의 바람과 안쪽의 증기가 소용돌이치며 순환하고 있다. 사람들은 색색의 얇은 반바지, 티셔츠, 수영복 같은 것을 입고 몸을 담갔다. 나는 지금 검은색 얇은 긴바지와 반팔 티셔츠 그리고 백색 목욕가운을 걸치고 있다. 가로 3미터, 세로 3미터 즈음의 정사각형 욕조가 두 개 있었다. 욕탕은 비스듬히 사선으로 배치되었고, 둘 사이를 검은 방수천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빈 욕탕으로 걸어가 가운을 입은 채로 몸을 담갔다. 창문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밤공기를 들이마셔보았다. 긴 호흡에는 먼 곳 도시 야경의 냄새가 배어 있다. 욕탕 물은 몸이 나른해질 정도로만 따뜻했다. 나는 눈을 감고 건너편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목요일 밤 시간이라 생각하며.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외지의 언어처럼 흐트러지고 뭉개졌다. 눈을 감고 있는 와중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내 시야는 빠른 속도로 삼층의 목욕탕을 비행하며 두리번거렸다. 욕탕에는 여전히 내 몸이 담겨있고 건너편 사람들도 그대로 있다. 공중에 누군가 떠 있다. 어깻죽지에 조그마한 날개가 달린 아이. 육체의 비율로 보기에 2살 정도의 어린 아기 같았지만, 몸집은 어른보다 컸다. 머리통은 어른의 튀어나온 뱃살 만하고 살집이 통통한 손가락은 대장장이보다 두텁다. 젖은 머릿결은 무척이나 곱슬거렸다. 큐피드. 신화에 비해 그는 사랑스럽다거나 살가운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커다란 눈망울은 반항심이 가득했다. 아이의 심술이라기보다 의심 가득한 어른의 눈초리에 가까웠다. 굳게 답은 입술 또한 미움보다는 염세에 가깝다.


 무엇보다 온몸이 푸른색이다.


 온천의 증기를 머금어 광택을 발하는 머릿결은 짙은 밤하늘의 남색. 보얀 피부는 겨울 하늘색에 가깝다. 그는 화살통이 묶인 흰 천을 몸에 둘렀다. 젖은 천은 푸른 피부색을 투영해서 그는 하나의 푸른 형체 자체였다. 겨울 색 얼굴과 대비대는 짖은 남색의 눈동자가 나를 묶었다. 그는 작은 활을 든 채 심술 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다른 한 손에 들린 화살이 보인다. 날카로워 보이는 납 화살촉. 지네의 다리만큼 많은 날 선 돌기들이 온천 물빛에 비춰 번뜩인다. 푸른 후광이 비치는 그는 여전히 공중에 뜬 채 진중한 동선으로 사람들을 훑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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