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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Sep 26. 2019

온천

밤하늘의 냉기, 수면 아래 온기. 그녀는 온천 같았다.

 그 여자를 다시 만났다. 놀란 눈으로 미소 짓는 얼굴이 살갑다. 나도 미소를 지었지만 섭섭한 눈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기억을 떠올렸다. 불안한 미소. 고개를 돌리고 긴 생각에 잠기던 그녀 뒷모습이 생각난다. 그럴 때면 현관 앞에서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는 열 살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복도를 지나는 인파처럼 낯선 시간이 등허리를 긁어내는 걸 신경 쓰면서. 돌이켜보면 그녀는 그저 날 따라 했을 뿐인지 모른다. 스스로 거울이 되어 내게 받았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돌려주려고. 그랬다면 제법 성공한 셈이었다. 기억 속 그녀의 첫 표지는 그 뒷모습이 되었으니까. 그때 난 꽤 비참한 기분이었고 이후에도 가끔 그녀와의 일들, 의미심장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암기하듯 그것들의 의미를 해석하다가 밝아지는 창문을 마주했다. 지금 그녀의 환한 미소를 보며 이미 난 버려졌고 이제는 지워지고 있단 걸 알았다.


 미소 짓던 그녀가 지금 온천을 가자고 한다. 그래 그녀는 온천이 어울렸다. 밤하늘 휘몰아치는 냉기와 수면 아래 머뭇거리는 따뜻한 물결이. 지금 밤은 깊다. 째깍 째깍 울리는 시계 초침은 내게 충고한다. 곧 새벽이 올 것이라고. 아침이 되면 밝음으로 채워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 분주히 거리를 돌아다닐 거라고. 그러면 나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가서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뜬 눈으로 지새울지 한숨 쉬게 될 것이라고. 반대로 그녀는 가로등 빛이 맺힌 갈색 눈동자로 지금 한 밤 온천에 몸을 담그자고 말한다. 늘 머뭇거렸다. 그녀 동공이 흔들거리는 걸 보았다. 나는 구두를 신은 채 수면에 몸을 담갔다. 옷감에 물이 스며드는 진득한 온기를 느끼며. 목을 드러내고 돌아본 온천의 풍경은 정원의 샘 같았다. 눈을 감고 차분히 하고 싶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사라졌다. 어디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밤의 화원. 여전히 시계 초침은 째깍 째깍 내게 충고한다. 밤의 침묵과 맴도는 온기가 꼭 그녀 같은 온천에 몸을 담근 채, 뜬 눈으로 밤하늘의 별을 주시했다. 째깍 째깍. 곧 창문이 밝아지고 알람 소리가 울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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