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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Dec 01. 2019

해안가의 북극곰 - 3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탄생과 동시에 떠오른 무수한 기억들 때문에.

 낯선 남자는 마녀를 찾으면 저주를 풀어달라 빌 것이라 했다. 미덥지 못했다. 그 마녀라는 것이 쉽게 요술을 풀어줄 요량이었다면 애초에 자동차를 북극곰으로 만들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길을 앞장서 걸으며 생각했다. 이곳에는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돌아다닐까. 마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까. 어떻게 그녀를 무찔러야 할까. 그 이후엔 무엇이 남을까.


 길은 더욱 좁아져 어깨마저 펼 수 없었다. 나는 코트를 벗고 굴처럼 좁아진 통로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때, 그가 황급히 뒤따라와 내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나는 옷가지에 조인 목을 부여잡고 기침했다. 낯선 남자는 내 팔 사이에 두터운 팔뚝을 밀어 넣고는 깍지를 꼈다. 발버둥 치는 나를 필사적으로 부둥켜안고는 뒤쪽으로 밀어내며 그가 외쳤다. 골목 안에 북극곰이 있다고. 동굴 같은 골목 틈 사이로 짐승의 뜀박질이 들린다. 북극곰은 벽에 온몸을 부딪혔다. 쾅- 두터운 충격음과 벽돌 파편이 내 몸을 훑고 튕겨나갔다. 북극곰은 반쯤 부서진 골목 벽에 몸이 갇혔다. 머리만 드러난 북극곰은 내 몸통만 한 주둥이를 벌려 비명을 지르고 있다. 마치 박제된 짐승의 망령처럼. 그리고 저것은 분명 따뜻한 히터 온기를 내뿜던 낡은 8인승의 자동차였다.


 나는 뭐라 생각할 틈 없이 달려가 북극곰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으르렁대는 곰의 주둥이에선 뜨거운 침과 입김이 적셔온다. 곰의 윗니는 내 왼쪽 어깨를, 아랫니는 오른쪽 옆구리를 껴안았다. 나는 왼팔로 북극곰의 이마를, 오른팔로 찢어진 귀 주위를 매만졌다. 손가락이 상처에 닿자 곰은 비명을 지르듯 누런 송곳니를 짓눌렀다. 두터운 스웨터가 뚫렸다. 고통이 밀려왔다. 그럼에도 상관없었다. 내 조그마한 상처는 북극곰의 이마, 귀의 상처 그리고 마음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저 멀리 낯선 남자가 어서 돌아오라 소리친다. 나는 눈을 감고 북극곰의 머리를 더욱 세게 안았다.  




 북극곰이 제 여린 살갗을 벽돌에 던졌을 때, 나는 지난날 그 자동차가 해수면에 몸을 던진 기억이 떠올랐다. 뒷좌석에 앉은 어린아이가 날 꼭 껴안고 있다. 앳된 살갗의 풋내와 어린아이 특유의 빠른 심박수가 느껴진다. 눈앞에는 앞좌석의 등받이와 그 사이 드러난 차창 풍경이 보인다. 운전석에 그 낯선 남자가 있다. 오른쪽 좌석에는 늙은 여자가 햇살을 손으로 가린 채 창가를 바라보는 중이다. 해안가 언덕을 넘어가는 동안 차창은 하늘로 가득 찼다. 고개를 넘어 경사면을 내려가는 동안에는 굽은 도로와 방파제 너머 바다 풍경 만이 가득했다.


 그때 운전석의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여자는 황급히 몸을 돌려 뒷좌석의 아이를 껴안으려 했다. 곧 유리창은 해수면과 충돌했다. 쾅- 두터운 충격음과 함께 차는 가라앉았다. 나와 북극곰은 한참 동안 바닷속에서 그녀와 어린아이를 지켜보았다. 갈고리가 차를 건져 올리고 늙은 남자가 달려와 그녀와 어린아이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었다. 며칠 뒤 그들이 땅에 묻혔을 땐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날 품에 안았다.




 눈을 떴을 때, 북극곰은 울고 있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북극곰의 검은 눈망울에 비친 내 모습은 기억 속 꼬마와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인형일 뿐이다. 비행기 창고 바닥에서 태평양을 지나던 게 기억나고 포장을 풀었을 때 미소 짓는 아이의 표정을 보았다. 저 멀리 마녀가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다. 늙은 여자는 낯선 남자에게 다가와 포근히 안아주며 말했다. 당신이 만든 생명들이 여기 함께 있다고. 남자는 마녀를 밀쳐내고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울먹이며 기어와 내 손을 쥐며 말했다. 미안하다. 너는 내 아들을 대체할 수 없었다. 그저 인형처럼 과거의 재현일 뿐이다. 너는 나를 기억 속에 가두고 괴로움을 상기시킬 뿐이다. 제발 이제 다시 인형으로 돌아가 주게.


 어느새 함박눈이 내리고 산을 장식한 작은 건물들의 불빛 속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 소리가 나지막이 흐르고 있다. 무릎 꿇은 노신사와 고깔을  늙은 마녀. 그리고 이빨에 찢겨 헝겊이 드러난 인형이 눈에 덮이는 중이다.  와중에도 북극곰은 고장  자명종처럼 연신 울부짖으며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탄생과 동시에 떠오른 무수한 기억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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