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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Nov 30. 2019

해안가의 북극곰 - 1

매 순간 나는 무엇을 위해 위험한 여정을 하는 것일까.

 밤. 이곳은 낯선 도시. 가드레일 너머 검은 바다 물결 그리고 점멸하는 크레인 구조물이 보인다. 나는 낡은 8인승 대형차 조수석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왼쪽 운전석에는 낯선 남자가 차를 모는 중이다. 산등성이를 깎아 만든 도시의 차로는 비탈을 따라 뱀처럼 구불거렸다. 길 양 옆으로는 낮은 건물들이 조밀하게 세워졌다. 낮은 수평선을 이룬 주택가 건물들은 계단처럼 경사진 산등성이 중턱을 뒤덮었다. 지금 한밤 불 켜진 건물들은 작은 전구가 되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산을 둘러 장식했다. 어느새 차창에 진눈깨비가 눌어붙어 녹아내린다. 히터를 틀어놓은 차 안은 꽤 따뜻하다. 반대로 저 바깥은 꽤 춥겠지.


 눈을 감고 히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발바닥에서 울리는 진동을 느끼며 상상했다. 나는 지금 비행기를 타고 있다고. 이곳은 고도 10km 상공.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중이다. 만약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해수면에 부딪힌 비행기는 반쪽이 날 것이다. 기적처럼 구명보트에 몸을 싣는다고 해도 10m로 넘실대는 물의 장벽과 쏟아지는 폭풍우를 견뎌낼 수 있을까. 수심 10km 아래로 침잠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내 몸은 변질돼 바다 눈이 될지 모른다. 그럼 다시 질문해보자. 나는 무엇을 위해 비행기를 탔고 누구를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걸었을 까. 매 순간 나는 무엇을 위해 위험한 여정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 나는 낯선 남자와 함께 차를 타고 밤길 어둑한 바닷가 마을을 지나고 있다.


 자동차는 주택가로 들어섰다. 미로처럼 구불거리는 골목은 점점 좁아졌다. 차는 벽틈 사이를 간신히 지나고 있다. 어느새 차문은 콘크리트 벽에 살갗이 뜯겨 날 선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럼에도 낯선 남자는 초연했다. 사이드미러가 떨어져 나갔다. 더는 차가 양쪽 벽에 짓눌려 움직이지 않을 때, 남자는 트렁크를 열고 좌석을 눕혔다. 그리고 몸을 돌려 트렁크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를 따라 골목을 거닐었다. 그러다 막다른 길에 닿았고 우리는 다시 차를 세워둔 곳으로 왔다.


 차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차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골목길 벽을 매만졌다. 그리고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누군가의 피가 묻어있다. 그 남자는 휴대폰 불빛으로 손바닥을 비춰 보여주었다. 진득한 액체 사이로 은빛 털이 묻어있다. 낯선 남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차는 짐승으로 변해버렸다고.




 나는 멀뚱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그늘진 그의 모습은 50대가 넘어 보였다. 180cm 정도의 훤칠한 키. 검은색 패딩점퍼와 진회색 터틀넥 스웨터, 그리고 통이 큰 청바지를 입었다. 군데군데 긁힌 검은색 로퍼가 가로등 빛에 반짝이고 있다. 청바지 무릎 쪽 색이 바래고, 구두 굽이 바깥쪽으로 닳은 걸 보아 평소 안짱다리를 하는 습관이 있다. 잔주름이 적고 허여멀건한 얼굴색을 보아선 주로 실내에서 일하며 살아온 듯했다. 살집이 있는 얼굴에는 미간과 입가에만 큰 주름이 있다. 매끈한 눈가를 보아 평소에 잘 웃지 않았을 것이다. 농담 같은 것도 하지 않았을 테고 우락부락한 성격도 아닐 것이다.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 지금 상황은 제법 심각하고 그 역시 두려운 기색이다. 그래 지금 그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손바닥을 내리며 말했다. 이게 다 그 할망구의 짓이라고. 짐승이 된 차는 지금 우리처럼 이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는 중일 것이라고. 그 와중에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만약 그 차가 정말 짐승으로 변했다면 어떤 동물로 변했을 것이냐고. 그는 손바닥에 묻은 털을 헤집으며 대답했다. SUV 같은 덩치에 흰 털이라면 북극곰이 아니겠냐고. 나는 그 북극곰이 우리를 알아볼 것 같냐고 물었다. 그는 즉각 대답했다. 마녀의 요술로 탄생한 생명은 그 이전에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그리고 그 기억이 생명의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그 북극곰은 우릴 헤칠까요? 그는 대답했다. 우릴 어떻게 대할지는 너와 내가 그 차에게 어떤 의미였는지가 결정해 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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