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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Sep 11. 2019

게스트하우스에 기록된 존재들 - 2

나는 이곳을 떠나지만, 어제 내 기록의 존재는 그들과 같이 남아있을까.



 게스트하우스의 현관문을 열었다. 가구와 조명 그리고 잡다한 소도구들은 이 곳 사람들처럼 잠이 든 듯 멈춰있다. 조금 뒤 아주머니가 실내 문을 열고 나와 졸린 목소리로 내게 1인실을 권했다. 나는 다인실을 달라고 말했다. 한적한 가을날. 밤중에 더는 누구도 오지 않을 것 같다. 더 적은 비용으로 넓은 방에 묵을 수 있었다. 동시에 반대로는, 이 묵묵한 여행에서 누군가를 만나 간단한 인사를 하고 싶었다. 방에서 느닷없이 마주친 내게 머쓱한 인사를 건넨 후 등 돌릴 것이다. 그 뒷모습은 내게 알려주겠지. 모두가 잠든 곳을 걸었던 사람이 나뿐 아닌 걸. "203호, 비밀번호는 9024." 아주머니는 흘겨 말하고 수건 한 장을 건넸다. 이곳에는 이층 침대 하나. 그리고 낮은 침대 하나가 있다. 나는 불을 끄고 낮은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잠결에, 인기척을 느꼈다. 암흑 속에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펼쳐두고 자면 안 돼요." 아주머니의 목소리일까. 아마도 다 같이 쓰는 공간에 내가 짐을 너무 던져두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여전히 눈을 뜬 채 돌아누웠다. 물론 내가 눈을 뜨고 있다는 걸 그녀가 알 순 없었다. 불 꺼진 방 안은 무척 어두웠으니까.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주머니는 그냥 돌아간 듯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감은 눈꺼풀 표면에서 밝은 빛을 느꼈다. 누군가 불을 킨 모양이다. 실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남자 한 명이 방에 들어와 있었다. 맞은편 이층 침대에 짐을 풀고는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그는 나를 골똘히 바라보다 내가 실눈을 뜨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 때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으쓱하곤 등 돌렸다. 나도 등을 돌려 다시 잠을 청했다.


 잠시 후 부산한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엔 여자 두 명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연신 깔깔거리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불이 여전히 켜져 있다. 어쩌면 방금 그녀들이 킨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계속 잠든 척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 출근길에 보았던 길고양이가 된 기분이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도로 위 고양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구역을 침범할 때마다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렸다. 자리를 떠나진 않았다. 자신이 마땅히 있을 곳은 그곳이니까. 언젠가부터 내 집에 다른 사람을 들이지 않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집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도화지에 잉크 자국을 흩뿌리고 그 형상의 의미를 규정하는 동안, 집은 내게 무정형의 시간을 흩뿌리고는 순간순간 선택을 요구했다. 판단은 내 행동의 의미를 규정하게 되었고 그 규정은 다시 나를 창조했다. 집은 모든 것을 무심히 지켜보았다. 미로를 펼쳐놓고 실험쥐의 행적을 기록하는 학자처럼.


 나는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온 그녀들을 이불 틈 사이로 훑어보았다. 지금은 어림잡아 새벽. 그녀들은 잘 생각이 없는지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한 여자는 겨울 옷을 입고 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패딩과 베이지색 니트 터틀넥, 그리고 짙은 청록색의 통이 넓은 울 팬츠 차림으로. 반대로 다른 여자는 한여름에 걸칠 법 한 짧은 붉은 반바지와 흰색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다. 둘은 방 중앙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신이 났는지 말투가 너무 빨라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때, 그들은 동시에 고개를 희번뜩 돌리고 누워있는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렇지 않냐고. 말하는 그녀 입술이 내게 머리털이 곤두서는 촉각으로 전해졌다. 생각했다. 그들과 말을 나눠선 안된다고. 그들과 나는 분명 한 공간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지른 것처럼 다른 공간에 머무는 것 같았다. 내가 말을 받아내지 않자 그녀들은 고개를 내밀어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호기심 가득한 눈꼬리. 의미를 알 수 없는 치켜 올라간 입꼬리. 그녀들이 말했다. 아까 전에, 너는 누구라도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았었냐고. 나는 질끈 입을 닫고 침묵했다.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주위는 밝음으로 가득 찼다.

 

 휴대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보았다. 오전 9시 24분. 눈을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그들이 집어먹던 과자 부스러기 한 톨, 베개에 묻힌 침 자국까지 모두 사라졌다. 무심코 바닥에 던져둔 짐을 확인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어제 짐을 침대 구석에 가지런히 정돈해두었다. 화장실은 물 한점 없이 건조했다. 샤워 후 젖은 몸을 닦으며 방을 둘러보았다. 어제 분명 그들을 보았었고 기척을 들었고 말소리의 파동을 촉감으로 느꼈다. 어쩌면 그들은 남은 여행을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일찍 떠났을 것이다. 지난밤 머물렀던 흔적을 깔끔히 없앤 채. 마치 이곳에 온 적 없었다는 듯이.

 

 아니면. 그들은 예전에 이곳을 방문했다. 내가 만난 건 그들이 제각기 그들의 시간 안에 이곳을 머문 흔적이라고. 그들 역시 나처럼 한밤 중에 홀로 이곳 게스트하우스의 203호를 묵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방이 흩뿌린 무정형의 시간 동안 그들만의 의미를 규정했고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그림처럼, 알 수 없는 유기체가 되어버렸을지 모른다고. 지금 내 집에서 살아 숨 쉬는 나의 흔적들처럼. 지금 게스트하우스를 떠나지만, 어제 내 기록의 존재는 그들과 같이 남아 즐거운 이야기를 건네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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