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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Sep 08. 2019

게스트하우스에 기록된 존재들 - 1

그 순간 내 몸은 그저 눈 두 개로 세계를 유영하는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기차가 속력을 줄이자 사람들은 도란도란 말소리를 풍겨내며 짐을 챙긴다. 지나치는 역의 기둥에 여수라는 팻말이 스친다. 무릎 위에 올려둔 짐가방 끈을 매만졌다. 그래. 여수에 도착했다.


 몇 시간 전, 나는 거실에 있었다. 열어둔 창문에서 가을바람의 체취가 불어온다. 앉은 소파 맞은편 벽을 바라보는 중이다. 고동색 원목 책상 위로 검은 텔레비전 하나를 올려두었다. 토요일 오전. 그 꺼진 화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것을 통해 세계를 여행하고 진귀한 동물을 보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가끔은 지나간 역사 다큐멘터리에 빠져들어 한참을 되돌려보곤 했었지. 저 사각의 검은 창. 창틀은 마치 유체이탈을 위한 통로처럼 내 눈을 저 먼 곳까지 보내버렸다. 그렇다면 화면을 보는 순간에 내 몸뚱이는 그저 눈 두 개로 세계를 유영하는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무심코 텔레비전을 틀었다. 그곳엔 여수가 있다. 내 눈 두 개는 창 너머로 빨려 들어 그곳을 여행했다. 그때 마룻바닥을 디디던 발이 말했다. 나는 여수의 마른땅을 한 번도 밟아 본 적이 없다고.


 여수의 저녁. 거리는 금세 어두워졌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이곳을 서둘러 떠났다. 텅 빈 역 앞 광장. 내 귓가에는 아직도 기차 안 사람들의 말소리가 여운처럼 맴돈다. 역의 출구에서 바라보는 시내. 거대한 천이 내려앉은 듯 오직 청색 한 가지 빛깔이다. 백청색 하늘 아래 흑청색의 낮은 건물들은 전신주 줄에 매달린 채 인형극을 추던 중이다. 밤의 장막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건물들은 장막에 제 살에 닿자 추위에 몸서리치듯 서로를 조밀히 끌어안았다. 집은 생명체처럼 전등을 깜박이며 날 쳐다보고 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할 수 있는 건 재킷 단추 두 개를 잠그는 것뿐이다.


 혼자 살아간 지 벌써 12년이 넘었다. 집을 떠났던 스무 살에는 막상 식사는 어떻게 차려야 하는지, 청소는 어떤 순서로 해야 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싱크대에 쌓인 접시에 곰팡이가 피어났을 때는 그대로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렸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순간순간의 판단은 다시 내게 책임을 추궁했고 매일매일 혓바늘처럼 돋아나는 보잘것없는 의사결정이 쌓이는 만큼 내 방식이란 것이 생겨났다. 며칠 전,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알았다. 십여 년 간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이 집안에 거울처럼 투영되었단 걸. 나는 더는 음식을 해 먹지 않았기에 실내 마감재처럼 반질한 스테인리스 싱크대는 물기 한점 없고 화장실에는 늘 락스 냄새가 났다. 이른 저녁 무료하게 흐르는 시간이 아까워 언젠가부터 그림을 그려온 탓에 집 곳곳에는 지울 수 없는 잉크 자국이 묻어있다. 누군가 염탐했다면 유별난 사람의 집이라 생각했을 법했다. 하지만 예전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이 집안에서 매 분마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고 누구도 지켜보거나 조언하지 않았다. 섣부른 판단은 옳든 그르든 나를 변화시켰다. 결국 이 집이 나를 재창조한 셈이다.


 가로등 없는 여수의 골목길. 길을 걷다 푯말의 형체가 보일 때면 걸음을 멈춰야 했다. 흐릿한 음영이 글자로 보일 때까지. 로르샤흐 테스트 같았다. 비정형의 의미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풀어낸다는 게. 나는 추위에 떨며 묵을 곳이 나타나길 염원했다. 막다른 표지판에 두 눈을 갖다 대었다. 어둑한 글씨가 서서히 또렷해지고는 게스트하우스가 오른쪽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얼른 골목을 꺾어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몇 년 전, 퇴근 후 늦은 저녁 소파에 늘어져 있던 내게 집이 말했다. 그림이라도 그려보라고. B3 사이즈의 종이를 꺼내고 펜을 찾으려 손가락을 뒤척이던 중 잉크병을 넘어뜨렸다. 병의 입구에서 휘몰아치듯 산란한 검은 잉크는 백지에 구체 형상의 얼룩 덩어리를 퍼뜨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서 이 그림의 의미를 맞춰보라고. 턱을 괸 채 한참 동안 얼룩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리고 외쳤다. 까치머리를 한 소년의 두상이라고.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얼룩을 그렸다. 그린다기보다 규정한다가 어울렸다. 단지 잉크를 흩뿌려놓고 그 형상을 규명하기 위해 때로는 삼십 분도 넘게 지켜보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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