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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Feb 09. 2019

호텔 방의 고양이

어쩌면 그녀의 숨겨진 약혼자 일지 모른다.

 늦은 오후. 햇살은 게으른 신처럼 턱을 괸 채 지면에 비스듬히 누웠다. 이곳은 번화가의 넓게 트인 도로. 발끝에 기다란 그림자가 늘어섰다. 그리고 내 걸음걸이를 흉내 내듯 느린 춤을 춘다. 한동안 그림자의 춤사위에 이끌려 길을 걸었다. 모퉁이를 돌자 그림자는 구두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는데, 고개를 돌리자 같은 보폭으로 걷는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하품하듯 내게 다가와선 오늘 하루가 꽤 길지 않냐고 말을 걸었다. 같은 곳에서 일을 하는 동료라고 했다.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말없는 발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이곳은 동양의 도시 같다. 오색의 조명이 깃발처럼 흩날리는 고층빌딩. 그 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고궁. 그리고 사거리 중앙에 자리 잡은 분수대와 청동 조각상들. 그녀도 풍경에 매료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여행하듯 정처 없이 걸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대로가 냉기로 발 디딜 틈 없어졌을 때 정류장을 발견했다. 벤치에 앉아 이국의 버스를 기다렸다. 그녀가 가방에서 청록색 담요 한 장을 꺼냈고 우리는 얇은 담요를 함께 두른 채 도시 야경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밤바람처럼 발목을 간지럽힌다. 그녀는 별안간 옅은 탄식과 함께 뻐근해진 어깨를 매만졌고 나는 자연스레 그녀 등덜미에 팔을 내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내뺐다. 머쓱해진 나는 팔을 걷어냈고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팔을 건네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짙은 숲 내음이 나는 청록색 담요가 나와 그녀의 어깨를 나란히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 손길에 고개를 내뺐을 때 그만큼의 반동이 내 어깨를 당겨왔다. 우리는 팽팽히 당겨진 천의 진동을 통해 서로의 숨소리와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을 때 나는 다시 팔을 내었고 그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로 재빨리 머리를 뉘었다. 우리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팽팽히 당겨진 담요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담요를 통해 불어오는 숨결에 감각을 곤두세운 내 꼴이 꼭 낯선 그녀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불안해졌다. 기댄다는 건 꽤 불쾌한 일이다. 숨 쉬듯 자연스레 내뱉는 내 말과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은 알 수 없었으니까. 나조차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래서 언젠가부터 의지한다는 건 바이러스로 물든 메일을 열어보는 행위가 되었다. 손을 건네는 순간부터 쌓이는 오류들이 내 머리를 헤집어놓게 둘 수 없었다. 그들이 날 떠날 때는 우리가 공유했던 시간, 말과 생각들을 미처 챙겨가지 않아서 남은 잔해들을 정돈해야 하는 노역이 싫고 그들을 위해 비워놓았던 창고에 바람이 새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의지하는 습관을 걷어냈다. 타인과 마주할 때는 늘 떠날 때의 온전한 내 모습을 염두하곤 했다. 투명한 장갑을 낀 채 타인의 손을 맞잡다가도 언제든 손때 묻은 장갑을 던져낼 수 있도록. 지금 밀려드는 숨결에 정신을 집중하면서도 그녀가 갑작스레 담요를 걷어내고 떠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문자가 왔다. 내 손에 쥐어진 건 폴더형의 로밍 폰. 익명의 메시지는 내가 아닌 그녀 이름을 부르며, 이곳의 야경이 참 아름답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얼른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태연한 말투로 발신자의 정체는 자신의 숨겨진 약혼자라고 했다. 한동안 멈춰있던 나는 팔을 거두고는 그림자가 숨어든 발끝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저 멀리 보이는 버스를 향해 담요를 걷고 몸을 일으켰다. 버스정류장에 혼자 남아 야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낯선 도시가 꽤 아름답다고 그래서 오늘의 산책은 의미가 있었다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녀의 약혼자라는 그 남자. 날 어떻게 알고 문자를 보냈을까.




 집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7시가 넘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몸을 눕히고 벽을 바라보았다. 백색 벽면은 벤치에서 담요를 걷고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을 투영했다. 그때 문자가 왔다. 이번엔 다른 동료였다. '설마 혼자 집에 간 건 아니지? 다 같이 맥주 한잔 해야지.' 오후 2시의 문자였다. 곧 4시 30분의 문자가 왔다. '너 어디 있는 거니.' 나는 답장했다. 숙소로 돌아왔다고. 통신이 잘 되지 않아서 이제야 문자를 보게 되었다고. 이곳은 해외이고 나는 출장 중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숙소일 것이다. 몸을 일으키고 낯선 실내를 둘러보았다.


 호텔 방은 하나의 저택처럼 내부에 수십 개의 방이 있었다. 방안의 긴 복도를 산책하듯 걸었다. 먼 곳에서 초인종이 울린다. 미로 같은 실내를 한참 헤매고서야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서너 명의 아이들이 문 앞에 모여있었다. 열 살 남짓의 꼬마들은 내게 하루만 이곳에서 묵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 아이 때문이었는데, 그 아이가 오늘 여자 친구와 심하게 다퉈서 아이들이 함께 묵던 방에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그리고 몇몇의 아이들은 그 아이를 위해 함께 낯선 곳을 찾고 같이 묵어주러 왔다고 말했다. 숙소에 방은 많았고 아이들의 말투는 제법 귀여웠다. 나는 빈 방을 가리키며 허락해주었다.




 그 아이가 말했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그 여자와 약혼한 사이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래도 세상은 넓고 그 여자보다 훨씬 좋은 사람들도 많지 않겠냐고. 그 여자가 점점 자신에게 모든 걸 의지하고, 늘 함께 있으려 할 때마다 심술이 난다고. 그래서 오늘은 내게 뺨을 들이미는 그 여자 얼굴을 할퀴어 버렸다고.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 여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너와 다투고 혼자 숙소에 남은 지금, 그녀는 이젠 너 없는 하루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지 않겠냐고. 거울에 비친 긁힌 상처를 보면서. 어쩌면 그녀는 지금 호텔 밖을 나가 바람을 쐬고 있을지 몰라.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네게 의지했던 기억과 감정을 흘려보내는 연습을 하며.


 아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그녀가 내게 맹목적으로 의지할 때마다 화가 나. 부담감이 들어. 그녀가 기대하는 만큼 채워줄 수 있을까. 무엇을 더 해줘야 할까. 맹목적인 애정을 갈구하는 그녀 모습에 어떨 때는 무력감이 들어. 그리고 모멸감이 들지. 나는 그녀에게 단지 채워주는 사람에 지나지 않을까. 하루하루를 그녀를 위해 소비해. 오늘 날 위해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떠나면, 나는 무엇이 남았을까. 그녀도 마찬가지일 거야. 내가 떠나면 그녀는 내게 의지했던 습관 말고 무엇이 남았을까.


 칭얼대다 잠이 든 꼬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꼬마와 그녀의 시간. 이제 서로에게 남은 건 할퀸 상처뿐일 거라고. 그 원인은 서로에게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무력했고 모멸감이 들었을 거라고. 나는 잠든 꼬마의 귓가에 속삭이고 싶어 졌다. 의지하는 것은 죄악이며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그러다 곧 부질없는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애초부터 꼬마는 자신을 위해 살고 싶었기에 그녀가 있어서 무력했고 모멸감이 들었을 거라고. 꼬마가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자 당장 그를 깨워서 묻고 싶어 졌다. 너는 내 삶이 부러운 것이냐고.

 



 꼬마들은 다음 날도 이곳에 묵겠다 욕심부렸다. 나는 곧 귀국해야 했다. 언제까지 그들에게 묶여있을 수 없어서 밀어내다시피 쫓아냈다. 얼마 후 그들은 물건을 두고 왔다며 다시 내 방에 들어왔다. 그리곤 한 아이를 찾고 있다. 알고 보니 아이 하나가 방을 나가지 않았다. 그 꼬마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의 표정은 심술궂었다. 그 아이를 찾으면 괴롭히려는 듯이. 이유는 알지 못했다. 곧 그 꼬마가 도망치듯 내게 달려왔고 서둘러 그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덤벼들려는 심술궂은 아이들에게 혼을 내었다. 크게 소리쳤다. “!” 그러자 별안간 아이들은 공중에 뜬 색색의 고양이가 되었다.


 나는 고양이들을 집어 들어 문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품에 안았던 꼬마를 내려놓았을 때, 그 역시 고양이가 되었다. 금빛 털의 고양이. 그녀가 나와 함께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보여주던 고양이. 어쩌면 그녀의 숨겨진 약혼자 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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