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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Jul 14. 2018

그녀 노트에 담긴 내 포스트잇

나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감은 눈 위로 떠오르는 건 목소리와 눈웃음뿐. 바람이 새는 듯한 목소리는 소란스러운 카페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 그때 장소를 잘못 골랐었다. 그녀는 자신이 다니던 회사 이야기를 하던 중이고 나는 입술과 손짓을 주시하며 애써 듣는 척을 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제법 알 수 있었다. 짙고 높은 목소리는 만들어진 느낌이다. 그래서 이면에 낮고 순한 말투가 숨어 있을 것 같다. 서른이 다가와도 아쉽지 않고 일이 좋다는 그녀의 말. 내겐 오히려 일을 좋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고친 목소리처럼.


 그녀는 이따금씩 송곳처럼 벌어진 입꼬리와 겹겹의 눈웃음을 내보였다. 그럴 때면 샤워 후 머리를 말리던 와중 거울을 보며 입꼬리를 반듯이 당겨보는 그녀의 어제를 가늠했다. 그녀가 둥그런 눈짓을 할 때는 다음 동작을 세듯 웃음과 웃음 사이 드러난 짧은 간극에 집중하게 되었다. 우리는 가벼운 잔을 비운 뒤 식당을 떠났고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

  



 문득 꿈에서 그녀를 만났다.

  

 이곳은 어느 어학원 실내. 교실 문 앞에 그녀가 서 있다. 눈이 마주치자 예의 살가운 입꼬리로 밝게 인사했다. 그리고 고개 돌려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나는 교실 뒤쪽 모퉁이에 구겨지듯 앉았다. 비스듬히 사선으로 걸친 시야로 그녀 뒷모습이 또렷이 보인다. 햇살이 차오른 오후의 주말 교실. 그녀는 지금 노란색 잔 줄이 그어진 하얀 반팔 티셔츠. 그리고 통이 넓은 연한 청바지를 입은 채로 고개 숙여 학습지를 읽는 중이다. 오른손에는 검은색 펜을 쥐고 왼손에는 페이지를 쥐고 있다. 렌즈를 낀 듯 두텁고 또렷한 검은 눈동자. 그녀 뒷모습을 훑어보는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듯 동공은 일정한 속도로 춤을 추듯 페이지의 글귀를 붙잡고 있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고 예의 밝은 갈색의 단발 머릿결이 입술과 뺨 사이를 잔잔히 맴도는 중이다. 의자 등받이에 걸친 남색 천 가방을 발견했다. 주머니가 반쯤 열려있다. 틈 사이로 두꺼운 회색 노트가 보인다. 나는 얼른 그것을 훔쳐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녀를 꼭 알아내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동질감을 느꼈다. 말투와 표정이 나와 무척 닮았으니까. 그동안 그녀들이 수없이 말했다. 당신은 나와 다르다고. 이번에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드는 건, 설렘보다는 동질감과 동정심. 전혀 그럴 것이 없는데. 왜 동정심이 들었을까. 화려한 말투 속 숨겨진 계산법. 살가움 속 우울함. 그것은 너와 나 누구든 가진 것인데.

  

 그녀가 자리를 비운 틈에 노트를 훔쳐 품 안에 넣고는 집으로 돌아와 펼쳤다. 억척스러운 글씨체로 빼곡히 채워진 일정을 읽으며 그녀 일상을 훑어보았다. 짐작했던 모습과는 달리 일정 속의 그녀는 매 순간 밝고 다정했다. 한참 페이지를 넘기고서야 그녀와 함께 했던 그 날을 찾았다. 그런데 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카페에서의 일도 적혀있지 않았다. 애초에 만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이었을까. 내가 그녀를 판단하는 동안, 그녀에게 비친 내 모습은 어떤 의미였을까.


 노트 뒷장에 튀어나온 샛노란 종이를 발견했다. 포스트잇 몇 개가 반듯이 붙어 있는데 글씨체가 내 것이다. 얼른 읽어보았다. 나의 일상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소한 기록들.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왜 내 편지를 간직했을까. 가방 속 노트를 가끔 꺼내어 읽어 보았을까. 내 쪽지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나는 무슨 의도로 그것을 썼을까. 잠에서 깨었을 때 애초에 그녀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단 걸 깨달았다. 꿈속의 편지는 그녀가 바라본 내 모습의 기록일까. 내가 그녀를 반듯한 입꼬리와 눈웃음 사이 침묵으로 규정했던 것처럼. 그녀와 나의 단편적인 시간. 그리고 나. 그 모든 것은 그녀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나를 그들은 정말 잘 알고 있었을까. 나는 그들을 잘 알고 있었을까. 무엇보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용도가 사라진 희미해진 시간 속에서 나와 그들이 서로 바라보았던 시선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었다 사라졌을까. 햇살이 들어차는 새벽. 나는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달려가 묻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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