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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May 14. 2017

잘 익은 과실 - 1

정작 들개는 온갖 생채기로 피 흘리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채 아득한 바닥을 보고 있었다. 사방에 안개가 가득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먼 곳을 바라보려 나뭇가지를 딛고 일어섰다. 그러다 중심을 잃고 추락했다. 꽤 긴 시간 하강하는 와중에도 지면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꽉 다문 어금니 사이로 새는 비명 그리고 갈고리처럼 말려든 손아귀가 그저 가상의 공간에 홀려 발버둥 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뭇가지에 파자마 옷깃이 걸렸다. 단추가 목을 조이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나는 가까스로 파자며 셔츠의 소매를 붙잡았다. 푸른색의 파자마 셔츠는 날 선 나뭇가지에 몸을 관통당했다. 매달린 채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시야에는 답답할 정도로 하얀 상공밖에 보이지 않는다. 휑- 하는 굵직한 바람이 귓가를 스쳐 식은땀이 맺힌 귓불을 털어냈다. 손아귀가 떨리고 팔이 저려온다. 소매를 부여잡고 다시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안갯속에 손을 휘저었다. 어떤 것도 잡히지 않는다. 대신 파이프에 귀를 댄 듯 일정한 바람소리만 가득하다.


 고목의 살갗을 쓰다듬었다. 나무껍질은 거북의 등껍질처럼 표면에 암갈색 무늬가 잔잔하게 일었다. 껍질을 두드리자 탕-탕- 청동 같은 맑은 소리가 울린다. 나무껍질을 조심스레 뜯었다. 손바닥 크기의 껍질은 마치 닳아버린 갑골문 같다. 코에 대보았다. 옅은 과일 냄새가 난다. 핥아보았다. 시리고 달콤했다. 사과맛 유리 사탕처럼. 한번 더 껍질을 핥았을 때는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마치 한 번의 혀놀림에 맛이 날아가버린 것처럼. 텁텁한 나무껍질을 바닥에 던졌다. 껍질은 단풍나무 씨앗처럼 바람에 일렁이다 구름 같은 안개 표면에 안착했다. 어, 꽤 포근해 보여. 나는 긴 심호흡을 하고 몸을 던졌다.


 푹.


 구름 위에 몸을 누운 채 높이 솟은 고목을 바라보았다. 뜯겨나간 속살에서 금빛 진액이 수전처럼 흐른다. 곧 나무 주위에는 금빛 샘이 생겼다. 그러다 액체는 광활한 구름 위를 가득 메웠고 금빛 바다가 되었다. 어깨까지 수면이 차올랐을 때 서둘러 나무기둥 위로 올라가려 발버둥 쳤지만, 진득한 액체를 덮어쓴 고목은 내 손짓을 밀어냈다. 액체는 입가까지 차올랐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고개를 내밀었다. 곧 코가 막혔다. 숨결은 거품이 되어 수면에서 반짝인다. 금빛 수면은 눈꺼풀마저 덮었다.




 눈앞이 밝아온다.


 책상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알람 시간이 9분 남았다. 기지개를 켜자 마취가 풀린 살결처럼 관절 여기저기서 잔잔한 몸서리가 인다. 어디선가 두런-두런 하는 소음이 들린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그저 텔레비전이 켜져 있을 뿐이다. 다행이다. 모든 것이 정상이다. 욕실로 가려고 아홉 걸음 정도를 걷다 쓰러지고 말았다. 책상에 엎드리고 잔 탓이다. 감각 없는 다리를 붙잡고 눈을 찡그렸다.


  마침, 거실의 텔레비전 화면에는 들개 한 마리가 느린 속도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들개의 얼굴 근육은 그의 생애 동안 다져진 눈가의 주름에 따라 도미노가 쓰러지듯 자연스러운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근육이 세워놓은 표정은 흉했다. 마치 자신의 삶에 생채기를 내려는 어떤 것도 허락할 수 없다고 으르렁대듯이. 하지만 정작 들개는 온갖 생채기로 피 흘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덫에 물린 채.


 텔레비전 전원을 껐다. 꺼진 창에는 비 오기 전날 특유의 회색 구름이 맺혔다. 베란다로 가 난간을 잡고 안개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꿈을 꿨었는데. 안개가 가득한 금빛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는데. 삐- 알람이 울렸다. 고개를 젓고 욕실로 향했다. 칫솔을 잡고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는 산발머리를 한 남자가 양치질을 하는 중이다. 그를 마주 보며 머리를 감다가 슬쩍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그러자 거울 속의 남자는 내 미소가 괴기스럽다는 듯 흠칫 놀란다. 깜짝 놀라 턱을 추켜세운 그의 눈매가 괜찮아 보인다. 그는 다시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그리고 면도기 날을 입술에 대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공연장을 메운 관중들이 박수를 친다. 진회색의 턱시도와 붉은 넥타이를 한 그는 부드럽게 한 곡 불러본다. 나는 숨죽이고 목소리를 지켜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차분한 음성을 짓는다. 곡 마디마다 신경을 곤두세움에 미간이 구겨지고 목에는 힘줄이 돋는다. 관중들을 위한 고통이랄까. 노래가 끝나자마자 관객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그는 아이 같은 함박웃음을 짓다가, 정신을 차렸는지 표정을 지운다. 정제된 미소를 부리고 정중히 고개 숙여 무대를 빠져나갔다.


 반대로 거울 속에는 꽤 추한 몸매의 내가 서 있다. 출근. 흠칫 놀라 욕실을 나와 시계를 보았다. 서둘러 씻고 미스트, 스킨로션, 선크림과 바디로션 그리고 헤어크림을 머리에 바른 채 옷장을 뒤척였다. 진회색 슈트와 회색 셔츠, 남색 넥타이에 검은 핀을 끼웠다. 검은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전신 거울에 비친 무채색의 모습은 하나의 동상 같다.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새벽까지 챙겨둔 서류가방을 들고 거실을 나왔다. 식탁에 올려 둔 잘 익은 사과 한 개를 손에 쥐고.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있다. 최대한 간결한 동선으로 들어선 뒤 반 바퀴를 돌아 사과를 씹으며 화면을 주시했다. 9, 8, 7, 6, 5, 4, 3, 2, 1. 경비원이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끄떡이고 주차장을 향했다. 직선으로 경보하듯 걸어가 차문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시동을 걸었다. 월요일 아침 차로는 늘 막힌다. 좀 더 일찍 일어났어야 했다. 차라리 잠을 자지 말았어야 했다. 오늘은 그럴 가치가 있는 날이니까. 연신 시계를 보며 핸들을 두드리다가 꽉 막힌 차로 중점에서 자동차를 공중으로 띄었다.


 허공에 뒤뚱거리는 차를 부여잡고 전진했지만 미처 하늘을 뒤덮은 전신주를 생각하지 못했다. 거미줄처럼 엉킨 전선을 겨우 풀어내고는 차를 지상으로 내려두었다. 마침 신호등에 불이 켜졌다. 긴장이 용솟음친다. 차분한 기분을 유지해야 한다. 클래식을 틀었다. 그리고 회사 앞으로 사뿐히 미끄러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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