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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May 14. 2017

잘 익은 과실 - 3

나는 개처럼 달려가 과실의 향을 킁킁대고 싶어 졌다.

 가만히 누워 있자니 시간이 멈춘 듯했다. 똑딱- 책상에 놓인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린다. 팔을 쓸어 손목시계를 더듬었다. 집에 들어온 지 4분이 지났다. 가슴에 손을 얹었다. 쿵닥-쿵닥- 하는 심장소리가 느껴진다.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 이리저리 침실 천장 곳곳을 바라보다 벌떡 일어났다. 종종걸음으로 실내를 걸었다. 옷장을 뒤척이고. 식탁에 앉아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계속 두드렸다. 그러다가 베란다로 갔다. 겨울 햇살은 희고 두텁다. 유리창으로 사방이 막힌 이곳은 온실처럼 덥다. 어디선가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유리창이 열기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굽어진 유리벽은 파도처럼 순식간에 나를 감싸 옭아매었다. 황급히 몸을 돌리며 벗어날 틈을 찾는 동안에도 유리벽은 베란다 중점에 서 있는 나를 몇 겹이나 감쌌다. 멀뚱히 눈만 크게 뜬 채 몸이 굳어버렸다. 생각했다. 이곳은 베란다라고. 난간을 넘어서면 바로 낭떠러지 행이라고. 버텨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한 발짝도 움직이면 안 된다. 심호흡을 하고 나를 둘러싼 원통의 유리벽을 응시했다. 겹겹이 둘러싼 벽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일그러진 화면처럼 찢어지고 넘어졌다. 두꺼비의 살갗처럼 울룩불룩한 유리 표면은 각각의 작고 큰 렌즈가 되어 햇살을 받아 내게 찔러대는 중이다.


 데워진 온실은 서 있던 발바닥을 녹여버렸다. 곧 하반신마저 살색 액체가 되었다. 바닥에 눕혀진 옷가지는 호박 보석 속 곤충처럼 살색 물결에 덩그러니 담겨있다. 내 머리통만 남았다. 그럼에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여전히 빽빽한 유리창을 바라보는 중이다. 꿈의 순간이 기억났다. 금빛 바다를 항해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커다란 배도, 구명보트도 없었다. 그저 침잠했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빽빽한 안개를 바라보던 때처럼 나는 일그러진 유리창 바깥 풍경을 보며 떠올렸다. 오전에 사무실을 떠날 때 비아냥거리던 동료 직원들의 비웃음. 그리고 어제 격려와 칭찬을 쥐어주던 동료직원들의 살가운 눈빛.


 몸을 감쌌던 원통의 유리벽이 다시 사각의 베란다가 되고, 몸을 웅크린 채 주저앉은 나를 인지하고서야 발코니를 벗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과일과 채소로 가득한 냉장고 구석에 생수병이 있다. 벌컥 벌린 입 안으로 쏟아부었다. 물은 콧잔등과 눈꺼풀을 덮었다. 나는 페트병을 던지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닫으려던 순간, 선반에 위태롭게 걸친 사과 하나를 보았다. 껍질 채 베어 물었다. 와삭- 과즙이 혀 속으로 스며든다. 베란다 바깥에서 노을 햇살이 밀려들고 있다. 마치 가여운 박쥐를 태워 죽이려는 횃불처럼.


 노을이 비친 사과가 탐스러워 보인다. 식탁에 사과를 올려두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베어 물었던 사과 속 씨앗이 입안에서 꿈틀댄다. 씨앗을 식탁에 뱉었다. 씨앗은 순식간에 커다란 사과나무가 되었다. 뿌리는 식탁을 감싸 쥐었고 나무기둥은 천장을 굽어 거실을 덮었다. 곧 잎사귀 사이에서 붉은 열매가 피어났다. 크리스마스트리의 붉은 공만큼이나 빛나는 사과알. 나는 개처럼 달려가 과실의 향을 킁킁대고 싶어 졌다. 한걸음 다가가자, 풍성했던 나무는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몇 걸음을 더 걸었을 때, 사과는 여린 줄기 하나가 되었다. 이곳은 어느 야외 풀밭. 불어오는 산 바람에 어린 꽃은 부들부들 떨고 있다. 꽃잎에 손을 대는 순간, 꽃은 봉오리가 되더니 지면 속으로 숨어들었다. 어린아이는 조그만 씨앗 하나를 쥐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의 손을 이끌며 말했다. “씨앗을 땅속에 묻어봐. 그러면 잘 익은 과일을 가질 수 있어.”


 아이는 씨앗을 묻고는 그대로 땅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웃는다. “씨앗은 금방 과일나무가 되는 게 아냐. 수 십 년을 다듬어 줘야 나무가 되지. 그렇게 땀 묻힌 과육은 참 맛있지. 그 맛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니까. 세상엔 그만큼 달콤한 게 없거든. 그런데 말이야. 과육은 껍데기일 뿐이야. 결국 누군가에게 파 먹힐 뿐이지, 절대 네 것이 아냐. 중요한 건 과육 속에 씨앗을 만들어내는 거란다. 내가 먹히고 버려져도 절대 훼손되지 않는 것 말이야.”


 아이는 조그만 손으로 씨앗이 잠든 흙바닥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잘 익은 사과를 건네주었다. 아이는 태양처럼 붉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한 입도 배가 부른 듯 커다란 사과를 두 손에 쥐고 난감해했다. 아이의 검은 동공에 노란 사과의 속 빛이 황금처럼 비친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자, 아이는 혼잣말을 했다. “씨는 맛없어.” 그리고 씹다만 조각난 씨앗을 뱉었다.




 나는 거실에 누워있었다.


 열린 냉장고, 나뒹구는 페트병, 식탁에 올려진 사과가 보인다. 몸을 힘겹게 일으키고는 손목시계를 들췄다. 5시 35분.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배가 고프다. 욕실에 가서 거울을 보았다. 그새 수염이 자란 얼굴이 텁텁해 보인다.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훔친 뒤 밖을 나섰다. 오랜만에 햄버거가 먹고 싶다. 어렸을 때 처음 맛보았던 그 낯선 치즈버거의 맛이 떠올랐다. 카운터 앞에서 손목시계를 다섯 번쯤 볼 때서야 음식이 나왔다. 봉투를 낚아채고 가게를 나왔다. 거리는 붉고 어두웠다. 멀리서 금빛 태양이 묵직한 구름에 가려졌다. 그래. 눈부시지 않아서 좋다. 찬바람 때문인지 사람들은 인상을 쓰며 빠르게 길을 걸었다. 그들이 날 지나칠 때마다 바람이 뺨을 긁어댔다. 점점 입가가 얼어붙는 기분이다.


 갑작스레 전화가 울렸다. 나는 아침과는 다른 다정한 말투로 그녀에게 오늘 야근이 생겼다고 말했다.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소리가 커져갔다. 꽤 오래 통화를 했다. 그럼에도 갑작스러운 인터뷰처럼,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머니 속 뜨거워진 휴대폰이 손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담요를 덮고 꾸벅 조는 경비원을 지났다. 1, 2, 3, 4, 5, 6, 7, 8, 9.


 첨벙-


 현관 앞에서 신발을 벗다 봉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봉투 속에서 쏟아진 콜라는 원목 마루를 밀물처럼 덮어갔다. 나는 무릎을 꿇고 갈색 파도를 한참 바라보았다. 시계 초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만 탄산의 숨결이 폭죽처럼 맺히는 기포 소리만이 가득하다. 거실에도, 욕실에도 휴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다시 집을 나갔다. 가게에서 휴지를 들고 나왔다. 많은 걸음을 걸어서 다시 집에 돌아왔음에도 화가 치밀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내 짜증을 들어줄 것은 아무도 없잖아.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혔다. 새로 사 온 휴지를 한 움큼 뜯어 콜라를 덮었다. 새어 나온 얼음은 미지근한 마루에서 제 몸을 머뭇거린다. 마루를 덮은 휴지에서 목욕탕 로션 냄새가 난다.


 나는 고개를 들고 공중에 이는 향수를 원 없이 킁킁댔다. 눈을 감자 따뜻한 목욕탕의 증기, 하얀 수건, 바나나 우유 같은 것이 떠올랐다. 조만간 목욕탕에 가봐야겠다. 미끈거리는 바닥을 적신 수건으로 마저 닦아낸 뒤 세탁기를 돌렸다. 잔잔한 세탁기 소음을 들으며 생각했다. 한 번쯤 콜라를 쏟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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