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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May 14. 2017

잘 익은 과실 - 4

그래서 나는 회색 들개가 되고 말았다.

 고개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남색 하늘 아래 금빛 태양은 작은 과실처럼 줄어들어 지평선 아래로 하강하는 중이다. 다시 집안을 두리번거렸다. 벽 곳곳에 남색 잔상이 묻었다 사라진다. 예전에 학생시설 친구들과 가보았던 밤바다가 생각났다. 해변가를 거닐며 서로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 물어본 기억이 났다. 지금, 콜라로 흠뻑 적신 햄버거를 씹는 턱이 저리다. 보일러를 틀었다. 그리고 옷을 벗었다. 팬티 차림으로 데워진 거실 마루에 누웠다. 몸이 나른하다. 거실 벽 구석에 조그만 돌고래 장난감이 보인다. 그래 저걸 무척이나 아꼈었지. 나는 찝찝하게 일어나 돌고래를 향해 걸어갔다.


 실내 공기는 액화해 미지근한 바닷물로 변했다. 거실을 가득 채운 청록색의 바다. 천장과 맞닿은 수면 위로 물결이 일렁거린다. 저기 무채색의 돌고래가 보인다. 유유히 바닷속을 헤집고 다는 중이다. 이리저리 수심 속을 돌아보다 흥미를 잃었는지 몸을 회전하며 노래를 부른다. 나는 보일러 온기가 밀려오는 녹색 바다 밑바닥에 주저앉아 돌고래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돌고래의 춤사위에 따라 내 눈동자도 춤을 췄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십여 분이 지나고 어느 순간 돌고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적막감이 몰려왔다. 어디선가 굵직한 선박의 고동소리가 울린다. 붉고 뜨거운 과일이 생각났다. 나는 헤엄쳐 냉장고로 갔다. 문을 열자 식품은 해류에 쓸려 멀어졌다. 과실은 물살에 떠밀려 내 손아귀를 스쳐 지나갔다. 고동소리는 점점 사람들의 말소리로 변했다. 오전, 회사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그 목소리들.


 거실 한편에 놓인 서류가방에서 흑백의 새들이 쏟아져 나온다. 수백 마리의 가마우지가 바닷속을 헤엄치다 베란다를 향해 날아갔다. 사라지는 흰색의 종이, 그리고 검은 잉크를 보는 나는 회색 가마우지로 변해 있었다. 숨이 막혀온다. 수면으로 벗어나야 했다. 나도 베란다를 넘어 바깥으로 날아가야 했다. 몸을 일으켰다.


 순간, 천장 등이 꺼졌다.


 곧 천장에서 정전 안내방송이 흐른다. 전기가 소멸된 암흑 속에서 나는 달아날 곳이 없었다.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9시 20분. 1시간 전에 그녀는 집으로 갔을 것이다. 전화를 해 볼까. 곧 배터리가 꺼졌다. 바깥 야경 불빛이 베란다에서부터 밀려든다. 멀뚱히 야경을 바라보다, 방금 전 새들을 쫓아 베란다 너머로 뛰어내릴 뻔했단 걸 알았다. 나는 달아날 곳이 없었다. 텅 빈 집에서 몸을 웅크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시계 초침도 들리지 않는다. 목이 막혀온다. 적막은 내 존재마저 덮어가는 중이다. 나도 모르게 어둠에게 소리를 질렀다.


 “난 그저 열심히 내 먹을 것 챙기겠다는데, 왜 다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그는 서류가방을 들고 불 꺼진 사무실을 나온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운전하는 퇴근길. 차를 세우고 한참 전화를 받는다. 서류로 가득 찬 마루를 밟고 거실 책상에 앉아 내일 일과를 연습한다. 아침, 책상에서 깬 그는 입술을 깨물고 옷을 입는다. 차 안에서 그는 빵을 씹다 커피를 쏟는다. 그는 닦아낼 새 없이 회사 정문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간다.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온다. 강의실에는 아직 자리가 다 차지 않았다. 강의들 듣다가 곳곳에 침을 흘리고 조는 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날이 밝아온다. 학교를 나서 집으로 향하는 눈밑에 가로등 불빛 그늘이 진다. 아침을 거르고 점심 수업을 듣는 그는 어느새 책상에 머리를 박는다.


 다시 고개를 든 그의 교복에 침이 묻었다. 그는 숨죽여 기지개를 켠다.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그의 자리로 돌아간다. 아저씨가 그를 깨우고 독서실 문을 잠근다. 아침 그는 벌건 얼굴로 시험문제를 풀어나간다. 담임교사는 순위를 매긴다. 그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웃음 짓는 그에게 젊은 유치원 교사가 귀엽다는 듯이 다가간다. 교사는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생긋 웃는다. 그는 내일 아버지와 나무를 심기로 했다고 큰 목소리로 자랑했다.




 감은 눈꺼풀 바깥에서 밝은 빛이 밀려들고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눈을 뜨면, 주위가 너무 밝고 따뜻해서 시력을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그래서 더는 꿈이나 욕심 같은 걸 쫓을 수 없게 되는 것인지 두려워졌다. 또 혹시라도 고개를 들면, 빛의 장막이 들어차 두피를 따뜻하게 데워버리는 건 아닌지, 그래서 더는 차분한 기분을 유지할 수 없고 사사로운 감정에 젖어버려 흐물어지는 건 아닌지. 그렇게 되면 나 역시 패배자들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은 내게 삶의 패배자가 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나를 멸시하고 원망할 것이라고. 그리고 나 자신조차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럼에도 밝은 빛은 끊임없이 내 눈꺼풀을 간지럽혔다. 마치 백작의 살갗을 태우려는 듯, 마녀에게 화형으로 정의를 구현하려는 듯. 나는 빛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어둠의 환영 역시 무서웠고, 너무나 적막했다. 그래서 나는 회색 들개가 되고 말았다. 지금, 사람들의 덫에 물린 채 구해주려는 사람들에게 성난 이를 드러내고 있다.


 나는 스스로 지어낸 세계를 포기하고 눈을 떴다. 그리고 밝고 가벼운 아침 공기를 맞았다. 서둘러 시계를 보고 욕실로 향했다. 그러다 몇 걸음을 걷다 멈췄다. 휴가는 3일 남았다. 거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햇살을 맞았다. 눈이 너무 부셔와서, 안구에 눈물이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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