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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May 14. 2017

잘 익은 과실 - 2

헥-헥 하며 참아왔던 웃음을 뱉어냈다.

 로비에서부터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나는 전단지를 건네듯 인사와 칭찬을 뿌려나갔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직전 화장실에 들려 거울을 보았다.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손질한 뒤 미소를 지어보았다. 그리고 그 표정 그대로 무대를 향해 전진했다. 분주한 사무실 입구에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세요!” 사람들이 미소로 반겨준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각자의 일을 본다. 김이 새는 기분이다. 동료들은 아직 모른다. 나는 힐끔 그들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조금 뒤 한 직원이 내게 상자를 건넸다. 나는 미소 짓고 상자에 짐을 챙겨 넣었다.


 동료들이 내 분주한 몸짓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으니까.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그만 방이 생겼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유리벽 앞 책상에는 내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놓였다. 동료들이 열린 문틈으로 힐끔 쳐다보는 중이다. 사무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멀리서 중년의 남자가 온다. 악수를 건네며 내게 축하한다고 말하고는 수고했으니 며칠간 쉬고 오라고 했다. 내가 등을 돌리고 회사를 나갈 때 그는 혼잣말을 했다. 유리. 저 뱀 같은 자식 두고 보자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그 중년 남자의 책상을 흘겨보았다. 모니터 옆 벌어진 지갑에는 그의 가족사진이 있다. 그리고 파티션에 걸어놓은 액자. 히말라야에서 찍었다는 젊은 시절 그의 모습.


 주차장에 세워둔 차는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았다. 조금 전 그 중년 남자의 욕지거리가 떠올랐다. 차 안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헥-헥 하며 참아왔던 웃음을 뱉어냈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차에서 벌컥 내려 주차장을 뛰어다녔다. 목청 껏 소리를 질렀다. 메아리는 엠프를 타고 증폭되어 무지개 색으로 터져 나온다. 폭죽은 소나기로 변해 주차장을 휩쓸었다. 나는 빗물을 타고 일렬로 늘어진 차들 위로 미끄러졌다. 자동차의 능선을 따라 공중에 뜰 때마다 승리의 포즈를 취했다. 피겨 스케이트화를 신고 착륙한 뒤에는 매끈한 자동차와 손을 잡고 춤을 췄다. 그의 손을 떨쳐낸 반동으로 나는 주차장 지름만큼 한없이 미끄러져 원을 그렸다. 발이 너무 시릴 때까지. 그러다 시계를 보고는 다시 차를 탔다.




 이른 퇴근길. 도로는 활주로처럼 넓게 이어졌다. 속도를 높이고 창문을 열었다. 두피에서 느껴지는 펄럭이는 머릿결이 승리의 깃발 같다. 시린 겨울 탓인지 머리카락에 엉킨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차는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 중점에서 차를 멈춰 세웠다. 자, 차분한 기분을 유지해야지. 상공에서 창문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어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어디를 가야 할까. 당장 마땅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흠- 콧소리에 김이 피어오른다. 고도의 공기가 머릿결을 조금씩 옭아매고 있다. 두통이 일기 전에, 창문을 닫고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집을 향했다.


 조용한 거리 풍경을 쫓으며 한참을 달려갈 때 휴대폰이 울렸다. 습관대로 발신자를 확인하고 시계를 봤다. 지금은 업무 시간이다. 휴대폰이 멎었다. 고민 끝에 다시 발신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말이 적은 아버지와 안부인사를 나눈 뒤, 업무 중이라는 핑계를 댔다. 다시 드라이브를 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백색 구름 사이 들어차는 햇빛. 마치 무대를 가린 반투명한 장막 같다. 차창을 투과한 장막은 두피를 데웠다. 누군가 따뜻한 손길로 머릿결을 쓰다듬는 것처럼. 기분이 풀어졌다. 그러자 여러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일조량과 업무 시간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러다 빛이 기분에 영향을 미칠까에 대해 생각했다. 꼬리를 무는 생각은 낮과 밤의 반복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질문하게 되었고 그 연결고리의 끝으로 만족감과 공허함의 주제에 닿았다. 벌써 도로 너머 집이 보인다. 나는 지금 공허할까. 아니 만족한다.


 집에 도착했다. 1, 2, 3, 4, 5, 6, 7, 8, 9. 현관문을 열자 어제 그리고 오늘 그대로의 냄새가 콧잔등에 스며들었다. 최소한의 동선으로 가방을 놓고 외투를 벗었다. 손목시계를 본다. 아직 업무시간이다. 그러니 굳이 귀찮게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회사에서 다시 급한일이 생겨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까. 정장 차림 그대로 침실로 갔다. 침대에 쌓인 서류들을 바닥으로 쓸어내리고 침대 끝자락에 허벅지를 대고 뒤 돌아 누웠다. 눈을 감고 팔을 뻗었다. 손질한 뒷머리가 베개에 닿을 뻔했다. 그럼 어때. 베개에 머리를 묻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온몸에 저림이 퍼져나간다. 으- 하는 병약한 표정을 나도 모르게 지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을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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