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늘 일기

오늘, 82년생 김지영

공감할 수 없다고, 그들의 일상이 가볍거나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by 류인환

오늘, 친구와 함께 영화관에 갔다. 나는 영화관을 자주 가지 않는다. 같이 갈 사람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극장에 가더라도 주로 스릴러나 액션 장르를 본다. 최근에는 엑시트, 기생충, 조커를 보았다. 엑시트는 회사 사람들과 곤지암으로 워크숍을 떠나기 전 함께 보았고, 기생충과 조커는 친구들과 같이 보았다. 꼭 그런 장르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선택권이 없다. 남은 고기를 뜯어먹는 하이에나처럼 친구들의 여자 친구가 싫어하는 영화들을 그들과 함께 보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친구 하나가 여자 친구랑 헤어지게 되었다. 내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82년생 김지영. 처음엔 남자 둘이서 82년생 김지영을 보러 가는 건 좀 그렇지 않냐고 말했다. 그러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나도 언젠가는 여자 친구가 생기고 결혼을 할 텐데, 영화를 통해 미리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물론 하루 종일 카페에 앉아 있는 게 심심하기도 했다.) 개봉한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나서인지, 신사역 롯데시네마까지 가게 되었다.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한성 돈가스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스미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영화는 꽤 슬펐고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스토리 자체가 슬픈 영화였으니까. 나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몰래 눈가를 닦아내며 태연한 척을 했다. 내 옆에는 친구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상영시간 내내 장녀로 태어난 어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사촌 여동생들이 떠올랐다. KTX 안에서 우는 애기들을 달래던 아주머니들이 생각났다. 나는 그때마다 인상을 쓰곤 했었다. 휴직을 고민하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은 회사 선배들과 같았다. 영화가 끝나고 친구와 나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다짐했다. 우린 꼭 육아휴직을 쓰자고.


남고생인 내가 미술학원 수채화반에 들어갔을 때가 생각난다. 여자들로 가득한 반에서 청일점이 된 나는 그들의 살가운 장난에도 모멸감을 느끼고 인상을 쓰곤 했다. 한동안은 방문을 열고 여자들이 가득한 방에 들어서는 게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다 미대생이 되고, 제품 디자이너가 된 지금까지 많은 여자들과 함께 일하고 대화하면서 그들을 꽤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여자를 잘 알진 못한다. 그랬다면 지금껏 홀로 카페를 오갈 일도 없었다.)


다음날 회사에서 선배들에게 말했다. 그 영화를 보고 결심했다고. 누군가와 결혼하게 되면 배우자를 위해 휴직을 하고 커리어를 희생할 수 있다고. 내게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자 여자 선배들이 말했다. 그럼 여자들이 육아로 커리어를 희생하는 건 당연하고, 남자가 커리어를 희생하는 건 고결한 일이냐고. 그 말에 또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 장면 중 카페에서 아기가 쏟은 커피를 닦는 여주인공에게 주변 사람들이 맘충이라 말했던 게 생각났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친구에게, 내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같이 커피를 닦아주었을 거라고 말했다. 사실, 그것 역시 내가 그들에게 건네는 그저 고결한 베풂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나이 든 여자는 그 정도 고생 가지고 유난을 떤다고 말했고, 젊은 남자는 남주인공 정도면 훌륭하지 않냐고 말했다. 그들의 입장도 이해한다. 다만 공감할 수 없다고, 영화 속 주인공의 일상이 가볍거나 당연한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19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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