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즐거운 기분을 만들려고 애써본 적이 없었다는 걸.
며칠 전에 선배에게 말했다. 내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매일 여러 이슈들이 메일로 쏟아지는 만큼 내게도 깊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매번 다른 업무를 물어보면 흐름이 끊어지고 섣부른 대답을 하게 된다. 참 좋고 능력 있는 선배님이라 그 말을 꺼내기가 꽤 힘들었다. 최대한 돌려 말했지만, 선배님은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 또한 내게 아쉬운 것이 있고, 상사에게 매 시간 질문을 당하는 입장이니까. 그럼에도 그 말을 꺼내면 나와 선배 모두가 좋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마스크로 미안한 얼굴을 가리고 무덤덤한 말투로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마스크를 쓰면 표정관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참 좋다.)
그 이후 선배님은 질문하거나 대화를 거는 걸 자제해주셨고, 덕분에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이슈들을 더 깊게 생각하고 결론을 몇 번 더 수정할 수 있었다. 선배님의 테이블에 각 이슈별로 정리한 솔루션을 한 묶음 씩 차곡차곡 쌓아두는데 재미를 느꼈다. 선배님 또한 내 느린 대답을 침묵하며 기다리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내 출력물을 보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자 나는 금세 예전처럼 업무에 자신감이 생겼고, 스스로 더 속도와 깊이를 채찍질하며 활기를 느꼈다.
다음 날, 메일이 왔다. 젊은 세대들 몇을 선정해 토론회 같은 걸 정기적으로 열 계획인데, 뽑혔다고. 쓸데없는 잡담은 질색이지만, 관심 있는 이야기는 너무 좋다. 나는 시키지도 않은 손 들기를 연발하며 의견을 쏟아냈다. 그 짧은 한 시간은 뭐랄까, 스스로 정의했던 내 모습이란 환상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대화에 어색했던 내가, 대화를 하고 싶어 안달했다는 것. 앞으로 매달 그 기분을 느낄 것이란 예감에 설레었다.
토론회가 끝나고 라운지에서 커피를 내리는 동안 실수로 종이컵 하나를 떨어뜨렸다. 내리는 커피를 잡은 오른손은 그대로 두고, 왼손으로 공중에 뜬 종이컵을 완벽히 받아냈다. 그런 일은 내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늘 꽤 기분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화이트데이를 맞아 편의점에서 초콜릿을 잔뜩 샀다. 그리고 밸런타인데이 때 그랬던 것처럼 테이블마다 두었다. 그러다 팀장님 방에 들어갔을 때, 이미 잔뜩 쌓인 초콜릿 더미를 발견했다. 나를 비롯한 남자 팀원들은 여자 팀장님께 잘 보이고 싶은 요량으로 모두 초콜릿을 사 온 것이다. 경쟁이 붙기 시작했다. 한 명이 쪽지를 써 붙이자, 다들 웃으며 황급히 쪽지를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더 큰 초콜릿을 사 오기도 했고, 몽둥이 같은 거대한 사탕을 사 오기도 했다. 그 장난 같은 경쟁이 재밌었고, 내 오지랖으로 팀장님이 많은 초콜릿을 받게 되었다는 것도 뿌듯했다.
그렇게 어제, 회사를 나오는 동안에도 즐거운 하루가 아쉬웠다. 긴 여운이 남았다 오늘은 어떤 일을 해도 잘 될 것 같았고, 반대로 굳이 또 무엇을 벌여서 오늘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글을 쓰는 지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가끔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늘 털어내려고 마음을 정돈했지만, 한 번도 즐거운 기분을 만들려고 애써본 적이 없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