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늘 일기

오늘, 밸런타인데이와 양재천

다시 셔틀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침의 즐거운 여정이 떠올랐다.

by 류인환

오늘, 오전 6시에 알람이 울렸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밖을 나섰다. 밸런타인데이라고 길가의 편의점마다 초콜릿을 쌓아두었다. 팀장님께 잘 보일 요량으로 초콜릿 하나를 주고 싶었다. 물론 한 명에게만 줄 순 없다. 그래서 나는 팀원들의 수량까지 더해 삼만 원어치 초콜릿을 검은 비닐봉지에 한가득 넣은 채 정류장을 향했다.


입구에서 잠깐 멈춰 선 셔틀버스를 발견했다. 문이 닫히기 전 서둘러 탔다. 그리고 알아챘다. 서초캠퍼스 아니고 우면캠퍼스로 가는 셔틀을 탔단 걸. 기사님은 날 처음 보아서 그런지 의심의 눈초리로 힐긋 쳐다보았다. (가끔 우리 회사 셔틀을 이용하는 낯선 사람들이 있다.) 나는 가방을 꺼내 괜히 사원증을 목에 걸고는 창밖 먼 산을 바라보았다. 차는 출발했다. 잠깐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내려달라 말할까 고민하다 포기했다. 대신 카카오 맵을 펼치고 우면에서 서초로 가는 길을 찾아보았다. 걸어가도 될 것 같다. 산책이라도 하지 뭐.




낯선 건물 안으로 셔틀버스가 들어가자 묘한 스릴감을 느꼈다. 사원증을 꼭 쥐고 정문을 나왔다. 그리고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서초캠퍼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이곳으로 이사를 갈까 고민했었다. 코앞이 서울이고 주변도 한적하다. 무엇보다 수풀 냄새 가득한 양재천 근처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집에 있는 모든 방향제가 풀냄새다.) 길가의 몇 없는 빌라와 오피스텔을 유심히 보며 카카오맵이 안내하는 길을 걷다가, 양재천을 건너게 되었다. 놀랐다. 이곳에 살면 늘 출근길에 양재천 산책을 하게 되는 것이다.


초목이 가득한 수풀 길을 걸으며 장작이 타는 냄새, 물과 흙길의 체취를 맡으려 마스크를 벗었다. 개울에는 이름 모를 특이한 새가 헤엄치는 중이다. 사진을 찍으려 다가가자 날아가고 말았다. 수평선 뒤로부터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아저씨, 아침부터 조깅하는 부부들이 스쳐 지나간다. 징검다리도 팔짝팔짝 건넜다. 15분을 걸었을까, 익숙한 거리가 나오고 북적이는 차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이보리색 코듀로이 패딩 안으로 조그만 땀이 차오른다.




사무실에 들어서서 초콜릿을 빈 책상마다 올려두었다. 여자 선후배들은 가볍게 인사하고 받아갔다. 남자 선배들은 처음에 누가 초콜릿을 줬냐며 들뜬 마음에 미소를 지었지만, 내가 줬다고 하자 실망했다. 누군가는 설렌다며 자조적인 농담을 하고 돌아섰다. 그냥 주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초콜릿이 하나 남았다. 먹는 것보단 누군가에게 주는 게 더 유용하다. 연구소장님께 내걸 드렸다. 소장님은 내게 사랑한다 농담하고 기분 좋게 받아가셨다. 또 역시 그냥 주지 말았어야 했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기분은 좋았다. (오후에 소장님이 연구소 전체 인원들에게 초콜릿을 돌렸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내가 한몫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금요일 업무가 끝나갈 때 즘, 피로가 몰려왔다. 또 인상을 쓰게 되었다. 평소와 달리 서둘러 데스크톱을 끄고 사무실을 나섰다. 다시 셔틀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침의 양재천 여정과 초콜릿 농담이 떠오른다. 덕분에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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