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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영 Apr 28. 2022

이응의 우주

6. 삼각 나선


2020년의 중간, 시옷과 리을이  꼭짓점에서 이응을 구했을 , 이응은 처음으로 그들의 시간이 삼각 나선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의 시간은 각자가 -각자의 속도로- 찍는 무수한 점들로 선을 이루고 꼭짓점을 만들며 삼각 나선으로 흐른다. 그들은 삼각 나선의 굴레에서 필연적으로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면서도 무수한 점들을 찍어 간다. 그러다 어느 때가 되어 찍게 되는 꼭짓점에서 그들은 그간 안아온 상처와 흉터를 만지며 새로이 눈을 뜬다. 방향을 꺾어 또다시 무수한 점들을 찍어가기 , 그들은 각자가 찍은 꼭짓점의 위치를 알린다. 그럼 고통스럽게 점들을 찍으며 삼각 나선을 오르던 누군가는 고개를 들어 다른 누가 먼저 찍은  꼭짓점에서 스스로가 구해지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를 구하기 위한 꼭짓점을 찍으려 성실하고 지독하게  시간을 앓는다. 삼각 나선으로 흐르는 그들의 시간 속에 각자가 지독하게 괴롭혀져도 또다시 각자는 그들  하나가 구해질 것을 기대하며 각자가 찍은 꼭짓점을 떠나 무수한 점찍기를 이어 간다.


2021년을 두 달 남짓 남겨두고, 이응은 지독하게 앓던 가운데 구해졌다. 이전에 시옷과 리을이 찍어두고 간 꼭짓점에 도착한 이응은 그들이 이미 찍어둔 꼭짓점 위에 자신의 꼭짓점을 포갰다. 2021년의 어느 날부터 잠에 잘 들지 못하고 불안을 혼자서 끙끙거리며 견디던 이응은 별안간 날아든 새로운 형태의 자살사고에 덜컥 겁이 났다. ‘이응아 병원에 가보는 게 어때?’, ‘이응아 약을 먹어.’, ‘내 주변에도 약을 먹는데 정말 많이 괜찮아졌어.’, ‘병원에 가서 일단 수면유도제라도 처방받아 오자.’ 이응이 도착한, 시옷과 리을이 찍어두고 간 꼭짓점에는 그들이 그 자리에 꼭짓점을 찍으며 이응에게 수없이 보냈던 말들이 새겨져 있었다. 하여 시옷과 리을의 무수한 마음씀에도 분명히 스스로는 스스로만이 구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던 이응은 고집을 멈추고 역시 같은 곳에 꼭짓점을 찍고 방향을 틀기로 했다.  

“그래 맞아, 나 혼자서 할 만큼 했어. 이 정도면 충분해. 어떤 도움이든 나는 그걸 받아야겠어.”

이응은 정신건강 의원을 찾았다. 이응은 처음으로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믿어보기로 했고, 약을 먹어보기로 했다. 3시간의 기다림 끝에 의사 선생님 앞에 앉은 이응은 굳이 이응의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찢겨 나부끼는 것 같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 세 달째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고 털어놓았고, 그래서 일상을 지키기 어렵다고 말을 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이응의 말을 잘 들어주었고, 약을 처방해 주었다. 이응은 긴가민가 하면서도 일단 처방받은 약을 잘 챙겨 먹어 보기로 했다. 그러자 끙끙 앓고 불안을 견디며 삼각 나선 위에 힘겹게 점을 찍어가던 이응은 단 몇 주만에 그 변에 점을 찍으며 나아가기가 신기할 정도로 수월해진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이응은 그때 시옷과 리을이 찍어놓은 꼭짓점 위에서 스스로가 구해졌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구해진 덕분에 9개월 간 내려가지 못했던 서산 집에 내려가 자신의 부에게 그간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거라고 여겼다.


2022년의 초반, 삼각 나선으로 흐르는 그들의 우주 안에서 이응은 이제는 이응 자신이 변을 타고 가 지난날 자신이 찍은 꼭짓점에서 리을을 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응이 그런 생각을 한 건 현재의 이응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한 채 괴로움의 점들을 찍어 가는 리을보다 더 낫다는, 그런 오만한 마음에서 한 건 분명 아니었다. 내가 몇 명을 더 병원에 보내야 하는 거냐는 시옷 특유의 능글맞은 푸념에, 이응의 머릿속에 날아든 일종의 각성과, 모종의 비장한 마음,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 꼭 시옷이 또 리을을 구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시옷만 그래야 하는 건 아니었다. 이응이 해도 될 일이었다.

이응은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는 커다란 비장한 의무감으로 리을에게 전화를 해 주저리주저리 병원을 가라고, 같이 병원을 다니자고 떠들었다. 영 탐탁지 않아하는 마음의 리을은 이응에게 스스로의 괜찮음에 대하여 계속이고 말을 했다.

“아니야. 요즘 나 진짜 멀쩡해. 괜찮아. 상태 좋아.”

리을의 반복되는 확신에 찬 말들에, 그 끈질김에 어느 정도 설득되어버린 이응은 ‘정말 지금은 병원에 안 가도 될 것 같아.’ 하는 리을의 말에 그래 하고 힘없이 물러나 버렸다. 계속 반복된 리을의 괜찮다는 말에 되려 이응 자신이 정말로 괜찮은 리을에게 가스 라이팅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 입을 다문 것도 있었다.

그런데 기대도 없던 어느 날, 리을이 벽에 기대어 나지막이 건넨 말에 괜찮다는 말을 무수히 들은 그날과는 다르게 이응은 안도했다.

“너가 맞는 것 같긴 해. 지금처럼 스스로가 좀 괜찮다고 느끼는 때에 병원에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 늘 생각은 하고 있어. 진짜로, 힘들면 무조건 병원에 갈 거야. 그때는 무조건이야.”

리을의 말에 이응은 조바심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시옷이 자신을 구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자신 역시 리을을 구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이번에 그리게 될 삼각 나선의 변은 그 길이가 꽤 길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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