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번째 좌표는 공간에 남겨진 시간성을 포착하는 펜드로잉 일러스트레이터 예술인을 만나보았습니다. 공간은 시간을 담아내는 그릇이 될 때가 있습니다. 무대공간, 전시공간은 특별한 시간을 담아낼 수 있어 더욱 특별합니다. 오래된 건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오랜 기억이 함께 사라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도시재생 사업에서는 오랜된 건축이 가진 시간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지난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하나의 공간에서 교차시키기도 합니다. 여기 공간에 새겨진 시간의 기억을 잡아두는 예술가가 있습니다. 이 분이 서 있는 좌표에서 바라보는 시공간의 지평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랜시간이 담긴 건축의 자화상을 잡아두는 일러스트레이터"
1. 이름은? 사회에서 연차는 어떻게 되시나요?
정선희(작가명:루시드로잉), 직장생활은 약 10여년 해왔고, 작가로서는 2년차입니다.
2. 어떤 일을 해 오셨나요. 일터(작업의 공간)에서 당신의 역할을 소개해주세요.
저는 몇년단위로 관심분야가 바꼈는데 모두 건축이라는 큰 타이틀 아래 다양한 경험을 해왔습니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케미컬회사에서 디자이너로 활동도 했고, 건축소재 브랜드에 대해 수년간 마케팅을 진행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 관심 카테고리인 '건축' 중에서도 색이 바랜 근대건축물들과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가 담긴 건물들을 종이 위에 선을 겹쳐 제 필체와 감성으로 그리는 펜드로잉 일러스트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면서 재택근무를 시작했는데요, 오래도록 회사에서 오픈된 공간에서 일해오다 저만의 작업공간을 만들어 모든 것을 하나씩 제손으로 꾸미고 늘려가고 있습니다. 제 작업테이블에 앉는 순간 가장 안락하고 재밌는 공간인 샘이에요. 여기선 제가 크리에이터란 생각이 듭니다.
3. 한번 떠올려 주시겠어요. 당신이 하는(해 왔던) 일을 선택했던 내적인 욕구, 초심, 계기, 우연 등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건축, 공간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인테리어를 전공하기도 했는데 작은 건물공간이든, 건물들이 모인 마을이든, 건물을 지어낸 사람보다도 그 공간을 쓰는사람들, 그 공간에서 손때를 뭍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어지는 건물에 더 눈길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새로 지은 최신형 건물보다는 낡고 녹이슨 흔적이 남더라도 세월이 느껴지는 건물들에서 더 성숙한, 완성된 느낌을 받았던것 같아요. 그래서 일에 대해 피로감이 많이 쌓이던 시기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관심있는 건물들을 제 방식으로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건물을 어떻게 그릴까 고민하며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이 건물들이 마치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건물이든 설계도면이 있어서 계획에 맞게 지어지는데 이 건물이 정말 제역할을 하고 온전한 개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사람과 시간의 흔적에 따라 모두 다르게 변한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도 마찬가지로 내 얼굴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면 살아온 희로애락이 자연스럽게 얼굴에 스며들듯 건물도 그렇게 경험한 시간이 스민다고 생각해서 파사드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건물의 자화상을 그리는거지요. 이 작업들은 지금도 계속되고있고. 우리동네 시리즈, 근대건축 시리즈 등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4. 최근 3년 동안 스스로 느끼기에 가장 보람있었거나 의미있었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2020 루시 드로잉 행화탕 개인전>
어느날 회사에서 친한 팀장님이 '5년후의 여러분 모습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본적이 있나'. 라는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해본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내가 이 일이 너무 즐거운가, 보람있는가를 생각했는데 그때도 일이 즐겁기는 했지만, 온전히 내 생각과 감정이 담긴 내 작업으로서 보람을 느낄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몇년 후 루시드로잉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2년이 되어갑니다. 이 시간 동안 제가 관심있는 키워드에 대해 계속 공부하는 중이고, 많은 전시와 프로젝트들을 해왔습니다. 특히 올해 코로나로 힘든 와중에도 첫 개인전(2020.5~6 행화탕)을 무사히 치뤄서 스스로에게 너무 힘이 됐습니다. 같은 시기에 합천영상테마파크 루시드로잉 상설전시장도 재오픈했는데, 총 40여점의 작품들을 그리며 너무 재밌었던 기억이 납니다.
5. 당신은 다른 부족사람들에게 어떤 기대와 요구를 받는다고 생각하나요.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저는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하면서 상업작가냐 아티스트냐는 질문을 받은적이 있어요. 근데 이 둘의 차이를 모르겠습니다. 누구든 상업작가이고 누구든 아티스트거든요. 모두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고 모두 그 창착활동의 댓가로 수익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이걸 구분짓는게 무의미하다고 보는데 저라는 작가를 대하는 입장차가 달라서 굳이 구분짓는거라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저에게 의뢰를 하시는 어떤 분들은 저에게 얻을 목적이 명확하기 때문에 사장님으로 대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어떤 작업이든 저의 필체와 감성이 스미는 결과물들이기에 최대한 의견을 반영하되 저의 색을 잃지 않는 한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저의 그림그리는 행위, 건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공감하시는 분들은 지금처럼 디지털원본이 아닌 오로지 소장 가능한 작품에 대한 의견을 많이 주십니다. 그래서 올해는 안해봤던 시도도 해보게 되고 뭔가 스스로 도전할 이슈들을 많이 만들어주시는것 같아요. 이 두가지 입장 모두 저에게는 감사한 피드백이고, 관심을 주시는 것 자체가 계속 그림작업을 하는 힘이 되요.
6.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영감/영향력을 주었던, 책, 음악, 공연, 영화, 전시 혹은 저자, 작가 등을 소개시켜주신다면?
제가 회사생활하다 가장 지쳐있을 때, 남들도 나처럼 힘든가? 아니면 나만 힘든가에 대해 궁금했던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으로 남의 이야기에 관심가지게 되었고. 첫 에세이로 '임경선 작가'의 '자유로울것' 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남의 생각과 일상을 엿보는 느낌이었는데 작가님의 담담한 생각과 에피소드들이 여유로워보였고, 이 작가님도 저처럼 회사생활 후에 전업작가로서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시고 있는거라 비슷한 경험을 해온 동질감도 있었고, 나도 그분처럼 살고싶은 부러움과 왠지 모를 용기가 생겼던것 같습니다.
7. (서로 다른 부족의 '일의 방법'과 '생각의 관점'을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당신이 하는(해왔던) 일의 '기-승-전-결'은 보통 어떤 흐름으로 이루어지나요?
작품을 의뢰받은 경우, 보통 그림을 사용하는 매체나 장소, 그림의 대상이 되는 건물의 규모와 작품의 사이즈 등을 확인하고 가장 중요한 드로잉 단가를 협의합니다. 단가협의가 되면 건물 현장을 직접 가거나 사진 및 도면과 같은 자료를 통해 대상을 파악합니다. 그리고 스케치를 통해 구도와 분위기에 대해 의견나눕니다. 서로 원하는 방향이 확인되면 본격적인 채색(드로잉)이 시작되는데 이 때는 클라이언트께서 저에게 그림의 스타일에 대해 전적으로 맡깁니다. 그리고 제가 충분히 고민해서 만들어내는 컬러감과 디테일로 완성합니다.
7-1) 일의 과정에서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혹은 요구받는 가치는 무엇이 있나요?
제 작업 스타일을 존중해주시는거요. 제 그림은 파사드를 보는 건물의 자화상 일러스트이고, 색바랜 디테일이 특징인 작품들입니다. 이걸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주시면 진행이 되는데 간혹, 제 의도와 다른 이미지의 변형을 요구하시거나 변색해서 사용하시려는 분들이 있으면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림이 전해주려는 의도와 크게 달라질 수 있고 건물의 이미지도 바뀔수 있어서 정말 변형이 필요하다면 저와 다시 상의하시길 권하고 있습니다.
8. 누구나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어떤 도움과 협력이 필요한가요?
예전에는 브랜드마케팅을 해왔지만 지금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 제작자에 가깝습니다. 한가지 일에 몰입하기에도 빠듯하기 때문에 저 대신 저의 작품들과 스토리를 소개해줄 수있는 홍보, 유통에 대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림을 만나고 싶은 클라이언트 또는 소비자들에게 쉽게 소개되고, 작가들의 작품을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매체가 필요합니다. 지금도 몇몇 플랫폼이 있긴 하지만 그곳들은 회사가 자신들이 보유한 작가의 DB를 활용하는거라 포커스는 회사가 메인입니다. 이런것 말고 각 작가들마다 개성을 파악하고 지원할 수 있는 맞춤형 홍보서비스에 대한 지원매체가 필요합니다.
9. 당신이 가진 내적인 힘들 가운데, 어떤 힘이 강하신 것 같나요(장점, 나다운 것 등)?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것은, 꽤 디테일하게 보는 시선과 집요함이 있더라는 거였습니다. 그림에 몰입할수록 집중하고 끈기있게 완성해나가게 되는데 그동안 저도 몰랐던 집중력을 발휘하고나면 스스로에게 뿌듯해집니다.ㅋㅋ 내가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이었나! 싶어요.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어떻게 보면 그동안 몰랐던 내 본심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 같습니다.
10. 앞으로 어떤 일(작업, 역할)을 하고 싶나요? 그것을 위해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고 있(싶)나요?
제 그림이 시간이 스민 건축물을 그리는 작업이다보니, 아카이브의 성격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사라진 우리의 옛 건축물을 그리거나 남겨진 근대건축물들을 그리는데 조금 더 시대의 이야기와 감성을 담은 그림작업을 하고 싶고, 루시드로잉의 우리동네 시리즈에서도 우리이웃이 경험해온 동네의 이야기가 담긴 건물들을 그림으로써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게 되었음 합니다. 제 그림작업에 대해 공감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고 싶고, 우리 건축물들에 대해 시각적으로 감성적으로 기억하길 원하는 분들과 일하고 싶습니다. 기회가 되면 두번째, 세번째 개인전도 하고싶구요. 향후에는 저의 드로잉 에피소드를 책으로도 소개하고 싶어 준비중입니다.
11. 다른 부족에 속해있는 다른 역할을 하는 행정人기획人예술人 중 어떤 좌표에 있는 사람들과 당신은 이야기 나눠보고 싶으신가요? (세대, 역할, 조직 등)
제 작업이 건축물의 인상을 자화상의 느낌으로 남기는 작업이라 지역이나 국가의 관광, 홍보프로그램의 시각적 자료로서 프로젝트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제가 좋아서 그리는 그림들이 좀 더 실용적이고 적극적인 정보력을 가진 작품들이 되길 원합니다.